2016년의 ‘여배우’│① 현장에서 시장까지, ‘꽃’이라 불리며 가시밭길을 걷다

2016.12.20
지난 12월 13일, 한국 갤럽은 ‘2016년을 빛낸 영화배우’ 10명을 조사해 발표했다. 황정민으로 시작해 마동석으로 끝나는 이 명단에서 여성은 9위에 오른 [암살]의 전지현이 유일하다. 그는 또한 10명 중 유일하게 올해 개봉작이 없는 배우이기도 하다. 10년 전인 2007년, 같은 조사에서 49.7%라는 압도적인 비율로 1위를 차지한 것은 전도연이었다. 2008년에는 손예진, 김혜수, 전도연이 나란히 2~4위에 올랐다. 그러나 2009년 이후 5위 안에 여성은 단 한 명뿐이거나 아예 없는 추세가 이어졌고, 2014년에는 1~10위까지 모두 남성이 차지했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젊은 층의 구매력 하락, ‘남자 영화’의 유행과 함께 장르 다양성이 무너지면서 불과 몇 년 사이 여배우들의 입지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일단 여자가 주인공이면 투자사에서 난색을 표한다.” 여배우 원톱 영화를 기획 중인 프로듀서 A씨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투자자들이 어느 정도 신뢰하는 여배우는 전지현, 김혜수, 손예진, 전도연, 그리고 [아가씨] 이후의 김민희 등 다섯 명 가량에 불과하다. 한편에서는 “확실히 투자가 들어올 만한 여배우는 전지현 뿐”이라는 의견도 있고, 그 전지현마저 드라마와 달리 영화에서는 원톱보다 [도둑들]이나 [암살]처럼 ‘주요 인물’ 중 하나 정도가 안전하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남배우로 넘어가면 20대부터 40대까지, 각 나이대 별로 다섯 명 혹은 그 이상의 풀이 있다. A씨는 “엔터테인먼트 전반에서 배우가 획득할 수 있는 스타성의 상당 부분이 아이돌이나 가상의 캐릭터들로 넘어간 면이 있다. 게다가 연예 산업은 팬들이 눈덩이처럼 뭉쳐서 굴러가며 계속 떠들어줘야 움직이는 면이 있는데, 팬덤의 규모에서 남녀의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스타급 남배우들이 출연한 한 영화에서는 ‘브로맨스 마케팅’을 위해 포스터와 예고편 등에서 아예 주연급 여배우의 존재조차 거의 드러나지 않게 하기도 했다.

여배우의 역할이, 여성의 존재가 자연스럽게 지워지는 현상은 기획 단계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시나리오에서 주인공은 물론 조·단역까지 특별한 ‘사연’이 없는 경우 기본 값은 남성이고, 여성 캐릭터 중심으로 기획된 영화에 당시 ‘핫’했던 남배우가 캐스팅되자 멜로의 비중이 늘며 시나리오가 바뀐 경우도 있다. 여고생들의 이야기이자, 스크립터로 참여한 남순아 감독의 제안에 따라 ‘의사’ 역에 의도적으로 여배우를 캐스팅한 [걷기왕]은 예외적인 케이스다. 독립영화나 드라마에서 스타로 떠오른 20대 여배우라면 적지 않은 시나리오를 받을 수 있지만 그들에게 제시되는 캐릭터의 대부분은 남자 주인공의 첫사랑, 애인, 성노동자 등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배우 다수와 함께 일해 온 매니지먼트사 관계자 K씨는 “주인공이 아니라 단지 제대로 된 스토리 안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 할 뿐인데 찾기 어렵다. 마냥 공백이 길어질까 봐 캐릭터에 다소 아쉬움이 있더라도 일단 들어가 감독과 논의하는 수밖에 없다.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얘기해 보는 거다”라고 말했다. 그는 매니지먼트 업계의 대부분도 남성이다 보니 여성 캐릭터가 단순화, 대상화된 시나리오에 대한 문제의식이 크지 않은 것 역시 현실적인 어려움이라고 덧붙였다. 누군가의 부인이나 엄마, 마담 정도로 한정되는 35세 이후 여배우의 커리어는 더 막막한 과제다. K씨는 “여배우들끼리 모이면 ‘나도 남자면 좋겠다. 남자 배우들은 양아치도 될 수 있고 변호사도 될 수 있고 다 할 수 있어서 좋겠다’는 얘기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1월 말 [미씽: 사라진 여자](이하 [미씽]) 프로모션에서 “남자들이 피 흘리고 욕설이 난무하는 영화 보느라 다들 힘드시지 않았나. 이제 좀 새로운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는 엄지원의 발언은 이 척박한 환경에서 관객보다 더 목말랐던 배우의 속내를 보여준다.

어렵게 출발선에 설 기회를 잡더라도 여배우들의 ‘현장’은 또 다른 전쟁터다. 최근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의 네이버 브이앱 생방송 중 팬 서비스의 일환으로 함께 출연한 신인 여배우들의 다리를 덮은 담요를 내리겠다고 말한 김윤석의 발언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여배우는 “그런 일은 숨 쉬듯 흔하다. 오히려 주류에 있는 사십대 남성 배우가 사과를 하는 분위기가 되었다는 것에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나이가 좀 있고 유명한 남배우와 함께 촬영을 했는데 ‘연기 잘한다. 나중에 나랑 같이 격정 멜로 하자’고 하셨다. 그러자 같이 있던 남자 감독님이 ‘내가 그런 거 잘 한다’고 하시는 거다. 심지어 그건 일종의 칭찬이었다. 그 순간에는 웃었지만 돌아오는 길에 미칠 것 같았다”는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배우 염문경 씨는 “괜한 술자리가 많은 게 힘들었다. 먼저 나오면 ‘친목의 자리인데 왜 빠지냐, 그런 게 다 불이익이 된다’는 얘기를 계속 듣는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 남더라도 작업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사적으로 무의미한 연락이 오기도 하고, 불쾌한 경험도 있다”고 말했다. 배우 김꽃비 씨는 “영화의 꽃, 현장의 꽃이라는 식으로 칭송하듯 차별한다. 여배우는 모두에게 사랑받아야 하고 현장 분위기를 항상 부드럽게 해줘야 한다는 등의 역할을 기대 받다 보면 자연스럽게 거기에 행동을 맞추게 된다”며 여배우가 수행해야 하는 감정노동에 대해 언급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화장실에 가는 것도, 부당한 상황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조차 ‘여배우’에 대한 선입견 안에서 평가되고 재단된다. 여러 독립영화와 상업영화 현장을 경험해 온 촬영감독 이지민 씨는 “직접 성희롱을 가하지 않더라도, 여배우들을 바라보는 수많은 시선과 촘촘하게 짜인 프레임 자체가 굉장히 폭력적이다. 이는 그 자리에 있는 여성 스태프들에게도 그러한 분위기에 동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억압하게 만들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연기를 위한 ‘진정성’이라는 명분 역시 여배우들을 종종 함정에 빠뜨린다. 배우 권은수 씨는 “과도한 메소드 연기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거친 환경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를 맡았으니 실제로 늦은 시간 뒷골목에서 노숙자처럼 지내보기도 해야 한다는 거다. 그걸 받아들이는 배우도 있는데, 대단하고 존경스럽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 안전장치 없이 여성을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하는 건 문제 아닌가”라고 말했다. 상업영화의 경우, 남배우들은 대역 없이 액션신을 소화했을 때 박수 받지만, 여배우들은 노출을 불사한 베드신을 소화해야만 작품에 헌신했다는 찬사를 듣는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노력은 많은 경우 베드신만 편집되어 P2P 사이트에 떠도는 ‘엑기스 영상’으로 소비된다. 초상권은 배우의 소속사에 있지만 저작권은 제작사에 있고, “‘엑기스 영상’이 돌아야 IPTV 유료 다운로드가 늘어난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삭제 요구 등 대응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심지어 업계 경험이 적은 여배우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에로물’에 출연하게 될 수도 있다. 한 여배우는 “소위 ‘예술성 있는 독립영화’라며 출연을 설득한 작품이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 시나리오에 몇 줄 안 되던 베드신 위주의 성인영화로 개봉했더라. 여배우의 무지를 이용하고, 성적인 함의가 없는 신도 에로틱하게 찍는 식으로 제작한 것인데, 남배우와 달리 여배우는 이미지가 한 번 이렇게 소비되기 시작하면 커리어에 타격이 크다는 점 역시 성차별적이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험난한 걸음걸음마다 더해지는 것은 여배우들에 대한 대중의 유독 까다로운, 그리고 왜곡된 잣대다. “여배우들이 한 작품에 출연하면 유독 ‘기 싸움’에 대한 루머나 기사가 많이 나오는데, ‘기 싸움’이라면 남배우들이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여러 영화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작품이 흘러가지 않으면 차에 들어가 나오지 않는 남배우도 있고, 밴의 사이즈나 동반한 스태프의 숫자로 경쟁심을 불태우는 남배우들도 있듯 자신이 돋보이기를 원하는 것은 많은 배우의 속성이지만, 유독 여성들 간의 관계는 부정적인 프레임이 덧씌워져 소비되는 것이다. 연애 사실이 밝혀졌을 때 심하게 비난받고 성적인 욕설을 듣는 것도 여배우다. 특히 광고주들은 여배우의 열애설에 민감하다. 뷰티나 의류 계열의 경우 임신하면 ‘아줌마 이미지’가 생긴다고 여기는 분위기도 있다. 그러면서도 미디어에서는 여배우들이 20대 후반만 되면 끊임없이 연애와 결혼을 종용하고, 작품 관련 인터뷰에서 ‘상대 배우와 키스신은 어땠냐’고 묻는다. 온라인에 떠도는 악성 루머 역시 여배우를 끈질기게 괴롭히는 요소다. 예를 들어 ‘OOO는 스폰서가 있고 성형수술을 했다’는 식의 악성 루머 유포자를 고소한 경우, ‘스폰서 설’이 거짓임을 밝히기 위함인데도 성형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진단서와 엑스레이 촬영 결과 등의 자료를 제출해야 한다. 이처럼 사생활을 공개해야 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많은 여배우와 소속사들이 소송을 포기하기도 한다.

작품 홍보나 커리어 확장을 위한 예능 출연 역시 여배우에게는 쉽지 않은 미션이다. 대중이 원하는 ‘여배우’ 이미지를 유지하며 토크쇼에 나가면 할 얘기가 없고, 솔직하게 말하거나 감정을 드러내면 쉽게 구설수에 오른다. [미씽] 프로모션에서 공효진은 MBC [라디오스타]에 출연해보고 싶다고 말했지만, K씨는 “많은 여배우 소속사에서 [라디오스타]에는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상처 줌으로써 웃기는 게 당연한 분위기에서 혹시라도 기분 나쁜 표정을 짓거나 눈물을 보일 경우 ‘예민하다’, ‘유난이다’라며 손가락질 받는 건 대개 여성 연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배우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반응은 ‘못생겼다, 연기 못 한다, 촌스럽다’ 정도지만 여배우에게는 ‘외모의 어디가 싫다, 살이 쪘다, 역변했다, 늙었다, 누구랑 잤다더라, 쟤는 끝난 애다’ 등 훨씬 다양하고 구체적인 악성 댓글이 쏟아진다. 아무리 연기를 잘 해도 배역은 한정적이고, 아무리 멘탈이 강하더라도 이런 상황을 계속 겪으면 동기부여가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배우 이주영이 트위터에 쓴 “‘여배우’는 여성혐오적 단어가 맞습니다”라는 말에 쏟아진 비난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을 둘러싼 현실이 얼마나 여성혐오적인지 다시 한 번 증명했다.

그러나 수년간 출구가 보이지 않는 듯하던 현실은 미미하게나마 바뀌어가고 있다. K씨는 “[차이나타운] 개봉 당시, 많은 여배우들이 자신이 출연하지도 않은 이 작품의 성공을 염원했다. 자신들은 물론 배우 지망생들도 여성으로서 가능성을 볼 수 있길 바랬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올해 [아가씨]의 성공과, 김혜수 단독 주연으로 200만 관객을 넘긴 [굿바이 싱글]은 고무적인 결과다. 10년에 걸쳐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올린 천우희와 [아가씨]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김태리 등 모처럼 상당한 규모의 팬덤을 구축한 20대 여배우의 등장도 눈여겨볼 지점이다. 변화의 흐름을 타고 여성 영화인들의 ‘말하기’도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아이즈]와의 인터뷰에서 여배우들이 “어디로도 갈 수 없는데 계속 뭔가를 요구받는” 이중적인 상황에 대해 말했던 염문경 씨는 최근 자신이 겪은 상처와 전투의 경험들을 정리한 ‘나의 복수 연대기’를 여성 생활 미디어 [핀치]에 기고하기도 했다. 지난 10월 김꽃비 씨와 함께 페미니스트 영화·영상인들의 연대를 도모하는 페이스북 그룹 ‘찍는 페미’를 만든 박효선·신희주 감독은 장기적인 시스템의 변화를 꿈꾼다. 이들은 “우리는 여성이 작품을 더 많이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어떻게 좀 더 윤리적으로 영화를 만드느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연 배우들이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설파하면서 입소문을 타고 110만 관객을 돌파한 [미씽]은 올해의 막바지에 발견된 하나의 희망이자 중요한 전환점이다. 이지민 촬영감독은 “[미씽] 현장에서 여성 감독과 여배우들이 술이 아니라 물마시고 과일 먹고 스트레칭 하면서 일했다는 얘기는 단순히 재미있는 에피소드에 그치는 게 아니라 핵심이 담겨 있는 말이다. 그동안 영화 현장에서 이른바 ‘여성적’이라고 불리는 소통 방식은 멸시당하고 주류로 인정받지 못해왔는데 [미씽]은 그것이 갖는 가치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김태리 주연의 [리틀 포레스트](임순례 감독)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는 구정아 프로듀서는 “스케줄 빡빡한 남배우 캐스팅이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이상, 능력 있는 여배우들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작품을 기획하는 추세가 생겨나고 있다. 꼭 무엇에 대한 반대급부가 아니더라도 기획자 입장에서는 영화를 만들려다 보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전에는 너무 모험 아니냐고 했던 선택이, 이제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 모험을 성공시키는 것은 좋은 기획과 배우의 만남에서 만들어지는 좋은 작품, 그리고 그에 대한 관객들의 응답일 것이다. 2017년의 ‘여배우’들은 올해보다 더 많이, 높게, 멀리 날아오를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더는 ‘여배우’로 불리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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