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드라마를 하면서 ‘후회하면 안 된다’라는 것을 배웠어요”

2016.12.21
“친국방부 배우.” 박훈은 올해 KBS [태양의 후예] ‘최 중사’로 자신을 알린 후 가진 한 인터뷰에서 본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지만 스물일곱에 데뷔하고 지난 9년간, 군인 역을 맡은 건 [태양의 후예]가 처음이었다. 2013년 연극 [모범생들]에서 운동선수 고등학생을 연기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에게 ‘남성적인 매력’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했다. 큰 키에 다부진 체격, 강렬한 눈매 같은 외형적인 조건과 연극 [유도소년]부터 [벙커 트릴로지](이하 [벙커])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를 생각하면 그의 말은 의아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발견되었듯, 우리가 박훈에게서 발견할 것은 아직도 무궁무진하다.

어제(14일) 공연을 봤는데, 중간에 나간 관객이 있었어요. 공간이 폐쇄적이라 사전 경고를 하긴 하지만 실제로 나간 분은 처음 봤거든요.
박훈
: [카포네 트릴로지](이하 [카포네]) 때도 종종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이 공연은 현장성이 특징이잖아요. 물론 우리는 영국보다는 공간이 훨씬 넓고 천장도 막혀 있지 않지만, 어제 관객분은 컨디션 난조로 힘들어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상황을 대비하고 연습을 하진 않았을 텐데 대처가 매끄럽더라고요.
박훈
: 공교롭게도 어제의 멤버들이 대부분 이런 작품을 해본 적이 없는 배우들이기도 했고, 제가 제일 형이기도 해서 모시고 나갔어요. 그때 갑자기 박훈이 나왔지. (웃음) 원래 성격 자체가 어떤 위급상황 같은 게 생겼을 때 더 냉정해지고 해결방법을 빨리 찾으려고 하는 편이라 크게 당황하진 않았어요. 동생들이 그 이후를 잘 이어가기도 했지만, 그런 부분을 감안하고 봐주시는 관객분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C구역에 계시는 많은 분이 손을 들었는데, 아름다웠어요 그 장면. 이 공연은 워낙 공간이 좁아서 관객에게 너무 부담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관객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의식하면서 연기하느라 돌발상황을 못 볼 수도 있거든요. 근데 어제는 다른 관객을 위하는 마음이 그 짧은 순간에 펼쳐진 거잖아요. 정말 멋있다 싶었죠.

정확한 장·단점이 있는 연극인데, 이 작품은 왜 선택했어요?
박훈
: 3년 전쯤 친한 대표님께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들었던 작품이었어요. “나중에 공연하게 되면 저도 하면 좋겠네요” 정도로만 얘기했다가 실제로 작품이 제작되고 김태형 연출이 참여한다는 걸 알고 선택했어요. 사실 이거 시놉시스도 안 봤어요. 김태형, 지이선에 대한 신뢰 때문이었죠.

창작진에 대한 신뢰를 제외하고 작품을 봤을 때는 어땠어요?
박훈
: 되게 어려웠어요. 제가 의외로 외국 작품을 안 한 배우에요. 유일하게 했던 게 [트라이앵글]이라는 일본 라이선스 뮤지컬이었는데, 그것도 제가 다 한국적 감성으로 바꿨거든요. 이번 연습 때 (이)석준이 형이 농담 삼아 그런 말을 하신 적이 있어요. “얘는 모든 연기가 황정민식이야.” (웃음) 번안극을 왜 두려워하냐면 나를 외국사람으로 소개하는 게 너무 어색한 거예요. “안녕하세요, 김팔봉이에요” 이러면 괜찮은데, “안녕하세요, 알베르트에요” 아, 뭐야! 이렇게 되는 느낌. 그걸 깨부수는 게 어려웠어요.

그럼 번안극 보는 것도 어려워해요?
박훈
: 보는 건 진~짜 좋아해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하면 괜찮아요. 멋있어요. 기본적으로 날것, 생동감 있는 연기를 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사극이나 번안극 같은 걸 어려워했어요. 근데 뭐 SBS [육룡이 나르샤]도 했고, [벙커]도 하니까 많이 극복했죠.

[벙커]는 1차세계대전 중의 참호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라 감정적으로 쉽지 않은 극이더라고요.
박훈
: 전쟁, 벙커라는 공간에서는 나올 만한 이야기는 사실 많지 않아요. 세 작품 각각에 아더왕 전설, 고대 희랍극,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차용되는 건 아마 그런 이유였을 거예요. 우리에게 익숙한 신화나 연극들을 차용하지 않으면 전쟁이라고 했을 때 단편적인 느낌만 줄 수 있으니까. 누군가가 안 좋은 사고로 죽는 것을 봤을 때의 스트레스는 엄청나요. 저도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그것보다 천 배 만 배는 더 끔찍할 거예요. 그래서 관계, 사랑, 꿈이 좌절되는 과정을 통해 죽이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모두 전쟁의 피해자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전쟁이라는 것은 절대로 의로울 수 없고, 그 안에는 결국 피해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기서 다루는 죽음 모두가 굉장히 비극적이에요. 특히 [아가멤논] 같은 건 죽은 다음 캐릭터에서 빨리 나와야 되는데 여운이 좀 길어요.

물론, 솔저1이 [아가멤논]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왜 그 작품의 여운이 더 긴 거예요?
박훈
: [벙커]는 거의 재창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콘셉트만 두고 대부분의 내용이 각색 된 버전인데요. [아가멤논] 대본을 보고 기립박수 쳤어요. 이거 죽인다. (웃음) 쉬워요. 저는 뭐든지 다 쉽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쉬운 게 가장 어렵기도 하고. [아가멤논]은 전쟁을 겪으면서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가는 사람을 보여줘요. 누구도 행복하지 않고 전쟁으로 피폐해지는 과정을 보여주다 보니 전쟁이라는 것은 사랑조차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하고도 무서운 것이구나 싶어요.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인물이라 그런 것 같아요.

캐릭터와 본인을 잘 분리하는 펀이에요?
박훈
: 예전에 이성재 씨가 캐릭터가 잘 안 빠져서 심리치료를 받는 모습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요. 거기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캐릭터가 되는 거고,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본인이 되는 겁니다.” 저도 그걸 의식처럼 하니까 그래도 잘 되더라고요. 나오는 순간 바보짓을 해요. 으하항.

‘전쟁의 비극’이라는 주제는 동일하지만, 세 작품이 다루는 영역이 조금씩 다르잖아요. 유난히 박훈이 연기하는 캐릭터들의 진폭이 크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박훈
: 지금 생각해보면 되게 재밌는 건데, 배우를 그만두려고 했던 게 ‘나는 왜 맨날 멀티맨만 하지? 왜 매번 앙상블로만 부르지?’라는 의문 때문이었거든요. 물론 배부른 고민일 수 있지만.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주연 캐릭터를 연기하게 되니까 이런 작품을 만났을 때 지난 과정에서 쌓은 것들이 빛을 발해요. 변화폭을 크게 줘야겠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목표성이 달라야 된다고 느끼니까 톤이나 외형적인 것도 달라지나 봐요. 역시 그냥 되는 게 없어요.

‘배우를 그만두고 싶다’라고 생각할 때 김태형 연출을 만났잖아요.
박훈
: 뮤지컬 [형제는 용감했다]를 할 때 조연출한테 연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마땅한 기회가 없고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너무 어렵다는 말을 술 먹으면서 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그 친구가 태형이 형이랑 연극 [모범생들]을 하고 있을 때라 제 얘기를 한 것 같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형이 형이 제 작품을 하나도 안 봤더라고요. 그 작품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사람의 선입견이라는 건 생각 외로 굉장히 진해요. 만약에 어떤 무대의 멀티맨으로, 혹은 웃기고 나가는 사람으로 나를 봤다면 절대 김명준이라는 캐릭터로 캐스팅하지 않았을 거예요.

요즘은 주로 선 굵은 캐릭터를 해서, 성적 비관으로 자살 시도를 하는 명준이라는 캐릭터와 잘 매치가 안 되거든요.
박훈
: 그 자리에서 내 연기를 보지도 않았어요. 그동안 살아왔던 이야기를 하면서 “솔직히 다른 사람과 나를 참 많이 비교하고 살았던 것 같다”라고 했는데 그 얘기를 듣고는 그런 면은 되게 명준이랑 닮은 면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처음에 태형이 형이 카이스트 나왔다고 그래서 ‘잘난 척하면 욕이나 한 번 하고 나와야지’ 하고 있었거든요. (웃음) 저는 태형이 형이 진짜 좋아요. 배우가 하는 어떤 생각도 다 인정하고, 배우가 길을 찾아가도록 기다려줘요. 그러다 자기가 생각해도 개떡 같다 싶으면 멀리 떨어져서 혼자 담배를 슥 피고 있어요. 그럼 알죠. 오늘 정말 개똥같이 했구나. 오면서 “야야, 연기하지 마, 관둬.” 이러고 가요. (웃음) 그런 표현방식들이 오히려 배우가 더 고민하게 해요.

[모범생들]은 후에 운동선수였던 종태 역을 맡기기도 했잖아요.
박훈
: 명준이를 하고 그다음 해인 2013년에 종태를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라고요. 종태? 내가? 그랬었어요. 근데 되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그래서 처음 알았어요. 내가 남성적인 캐릭터를 하면 사람들이 되게 좋아하는구나. 멀티맨이랑 앙상블만 해서 그런 걸 해볼 기회가 없었거든요. 나한테 그런 느낌이 있나? 그때부터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박훈이라는 사람에게 소위 ‘남성적인 매력’의 지분은 어느 정도예요?
박훈
: 20도 안 되는 것 같아요. 껍데기가 약간 그렇게 생긴 건 있어요. 외형과 연기의 감성이 맞았을 때의 파워가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그런 모습이 많진 않거든요. 그래서 다른 캐릭터를 계속 하려고 노력하는 거예요. 주위에서 ‘군인 최적화 배우’라는 말을 하는데 (웃음) 사실 [벙커] 하기 전에는 [태양의 후예] 하나였거든요. [태양의 후예] 하고 나서 군인 역이 물밀 듯이 들어왔는데 일부러 안 했어요. 다른 모습을 계속 보여줘야 해요. 아직은 욕 좀 먹어도 돼요. 아직 완성형도 아닌데 뭐. 대신 ‘이런 거 하면 잘하는 거 알겠어’라는 느낌은 좀 받았어요. 알았으면 됐죠. 

무대에서는 작품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아직 아니잖아요.
박훈
: 열심히 하면 할 수 있어요. 노력하면 되더라고요. [태양의 후예] 끝나고 MBC [몬스터]에서 묵직한 비서, [육룡이 나르샤]에서 초절정 무림 고수 하다가 단막극을 하게 됐는데 거기서는 바람둥이 사기꾼이거든요. 잘하는지 못하는지는 방송을 봐야 알 것 같은데, 계속 하면 누군가는 다른 면을 봐줘요. 사람들이 ‘군인이 잘 어울려요’라고 하니까 아무 걱정 없이 하는 줄 알지만, 아우! 걱정이 한 천만 개였어요. 석준이 형은 너무 잘하고, 번안극에다 정신 못 차리겠지. 그래도 그렇게 계속 도전을 하는 것들이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걱정이 많은 편이에요?
박훈
: 아니요. 되게 편하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요. 그 순간 순간 재밌는 사람들하고 즐겁게 지내는 게 제일 좋아요. 그런데 일에서는 걱정이 태산이에요. 집에서 대본 보다가 한숨만 쉬어. 일 때문에는 스트레스 정말 많이 받아요. 잘하고 싶은 것도 있고, 계속 나를 의심해요. 자신감은 항상 많은데 진짜 이게 좋은 거야? 잘하는 거야? 아닌 거 같은데? 같은.

그 의심에 대한 확신은 누가 줘요?
박훈
: 저는 직언해주는 걸 좋아해요. 워낙 그런 얘기 많이 듣고 살아서 상처 안 받아요. 보통 매니저들은 모니터하면서도 연기에 대해 평가 안 하거든요. 우리 매니저는 다 해요. “이 연기 되게 이상하고요. 팔 어색하고요. 표정 이상하고요.” 그럼 “니가 해봐” 이러는데 (웃음) 그런 얘기 들으면 한번 생각해봐요. 화면에 비쳤을 때 저렇게 느껴지나? 연극의 경우에는 같이 가는 거니까 같이 하는 배우들한테서 더 많이 조언을 받고. 연극은 관객이 뿜어내는 기운이 있어서 내가 방금 한 연기를 잘한 건지 잘 못 한 건지 즉시 알아요. 그래서 좋은 쪽으로 계속 바꿔갈 수 있거든요.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무대에 있던 배우들이 다른 매체로 이동하면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다시 연극무대에 선 이유가 있다면 뭘까요?
박훈
: 휴식이 필요했어요. 2년간 드라마를 했는데, 드라마가 안 좋다가 아니라 그 안에서 많은 혼돈과 생각들이 생겨요. 연극은 소멸되는 예술이라 오늘 좀 못했어도 어떻게 하겠어요 내일 열심히 해야지, 날 안 좋게 보더라도 다음 공연에서 좋게 보면 또 감안이 되겠지, 라고 위안하는 게 있었거든요. 그런데 기록되는 예술을 하다 보니까 내가 내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견디기 힘들 때가 있어요. 거기서 받는 스트레스가 엄청나더라고요. 그래서 소속사에도 올 연말까지는 연극만 하고 싶다고 얘기했어요. 여기 오니까 다시 충전이 되는 것 같아요. [벙커]에서 석준이 형이랑 더블을 하게 됐는데, 제가 뭐만 하면 형은 계속 허허허허 하고 웃어요. [형제는 용감했다] 때 주연배우랑 앙상블로 만났으니까, 제가 많이 컸죠. 이제 더블을 합니다. 그것도 되게 영광스러운 일인 것 같아요. 잘 성장해서 이렇게 같이 공연을 하게 됐구나, 라는 되게 큰 에너지로 감싸주는 게 너무 감사하고. 방송이나 영화는 시스템적인 것도 그렇지만, 연극도 기록되는 예술처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줬어요. 후회하면 안 된다, 기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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