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이탈리아 할머니와 함께 요리를], 여성과 음식, 경청의 이야기

2016.12.23
제시카 서루가 음식 전통이 갖는 가치를 연구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신발에 떨어진 딸기였다. 어린 시절 제시카의 집에서 일하던 그라치엘라는 이탈리아식 초콜릿 스프레드를 바른 바삭한 토스트로 음울한 영국 아침을 밝혀주던 존재였다. 밀라노에서 열린 그녀의 결혼식에서 와인에 절인 딸기가 신발에 떨어지자 소녀는 울상을 짓는 대신 한 개씩 쏙쏙 집어 먹었다. 그 알딸딸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순식간에 되살아났고, 제시카는 15년 만에 전화를 걸었다.
 
“그냥 지켜보면서 시간을 보내면 돼요. 처음에는 실수해도 두 번째는 올바로 할 거예요.” 그라치엘라의 어머니 마리아를 시작으로 제시카는 1년 반 동안 이탈리아 할머니들에게 전통 음식을 배웠다. 따뜻한 크림과 고르곤졸라를 곁들인 폴렌타, 브라운버터와 샐비어를 넣은 호박 토르텔로니, 판체타를 넣은 회향 토끼 구이, 매운 토마토 잼을 바른 사프란 쌀 파이, 송로버섯과 프로슈토를 넣은 라자냐, 호두 후추 쿠키, 프로슈토와 훈제 프로볼라 치즈를 넣은 감자 파이…. 먹어보기는커녕 재료조차 생소하지만 먹고 싶다. 먹어야 한다.
 
마리아의 폴렌타에는 정해진 레시피랄 게 없다. 너무 걸쭉하다 싶으면 따뜻한 우유나 물을 조금 부으면 되고, 너무 묽다 싶으면 옥수수 가루를 더 넣는다. 미트볼을 곁들이면 더 좋겠지만 주머니 사정이 나쁘다면 토마토소스만으로도 훌륭하다. 폴렌타가 겨울 요리인 것은, 먹는 사람은 물론 요리하는 사람도 냄비를 연신 젓느라 열이 나서라니 이 얼마나 설득력 넘치는 설명인가. 오소부코의 인기 만점 부위는 뭐니 뭐니 해도 뼈의 골수이니 잊지 말고 빨아 먹어야 한다. 포르치니 버섯을 따오면 제일 예쁜 것들을 골라 튀기고 나머지는 토마토, 마늘과 함께 뭉근히 끓여서 엉덩이와 밀개를 이용해 만든 국수에 붓는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개인과 집단의 역사가 음식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역경 많던 브루나의 어린 시절에 음식은 일종의 안전막이었다. 아이들이 아프거나 노인들이 쇠약해지면 닭을 잡았고, 슬픈 일로 마음이 상하면 토끼를 먹었다. 남편이 여섯 아이를 남긴 채 죽자 궁지에 몰린 라파엘라는 어린 시절 먹던 빵을 기억해냈다. 그 빵은 건강에 좋고 유익한 것, 자칫 없어졌을 뻔한 영속적인 무언가를 대변했다. 대대로 내려온 비법을 더듬어 빵을 굽기 시작하자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여자들이 눈물을 흘릴 수 있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곳은 어딜까? 부엌은 가장 안전한 공간이고 요리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그들은 ‘부엌의 할머니’라는 추상적 이미지와 별개로 존재하는 구체적 개인이라는 사실이다. 브루나는 직접 키운 토끼의 가죽을 벗기고 내장을 빼낸 후 어마어마한 칼로 내리쳐 머리와 등뼈를 잘라낸다. 마리는 아름다운 육체와 춤, 담배와 와인을 사랑한다. 다리아는 처음 만났을 때는 욕만 했다. 이레네는 누구든 환영하고 함께 잘 먹지만, 마달레나는 마지막까지도 마음과 입을 열지 않았다. 열두 명의 이탈리아 할머니들과 제시카 서루, 그녀가 쓴 책을 읽은 나와 이 글의 독자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한다. 때로는 부엌 안에서, 때로는 부엌 밖에서.

정은지
책과 음식과 쇼핑에 관한 글을 써서 번 돈으로 책과 음식을 쇼핑한다. 책 속 음식에 관한 이야기인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썼고, [아폴로의 천사들]·[피의 책]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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