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의 마감 광시곡

2016.12.22
사람은 살면서 뭐든 시작하고 끝내는 일과를 반복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마감은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업무의 하나다. 회사를 다녀도 마감이 있고 공장에서는 마감 때문에 철야근무도 해야 한다. 그나마 회사를 다니면 출근과 퇴근, 그 사이에 마감이 이뤄지지만 집에서 일을 하는 프리랜서 만화가에게 마감은 꽤 자주 크고 심각한 고비를 던져준다.

마감은 월마다, 혹은 주마다 돌아오고 날짜는 늘 고만고만하게 정해져있으니 아무리 출퇴근 시간이 없다 쳐도 매일 조금씩이라도 작업을 해두면 마감이 딱히 압박이 될 일이 없을 텐데 어째서 마감은 늘 갑자기 닥쳐오고 만화가는 코뚜레에 끌려가는 소처럼 꾸역꾸역 마감과 싸우는 것인가.

마감만 되면 냉장고를 열어 내용물을 전부 꺼내놓고 구석구석 세제를 풀어 닦아내고 싶고, 화장실에 들어가니 타일 사이 줄눈이 시커멓게 때가 낀 것이 심하게 거슬리기도 한다. 갑자기 스마트폰을 꺼내들고 시작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게임이 너무 재미있어서 손을 뗄 수가 없고,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보고 이런 날씨에는 동네 한 바퀴라도 꼭 돌아다녀야 할 것 같다. 심지어는 이런 일도 있었다. 마감을 앞두고 영화가 보고 싶어졌는데, 때마침 다른 작가가 전에 약속한 자료를 주겠다는 이야기에 극장이 있는 근처에서 만나 영화를 보자고 설득했다. 그런데 그 작가가 마감해야해서 영화는 못 보겠다고 하자, 그 마감 내가 도와줄 테니 부득부득 영화 보자고 조르기도 했다. 내 책상에는 아직 손도 못 댄 원고가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남의 원고 마감을 돕는 건 내 원고보다 재미있다.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작가의 마감 전 하루나 이틀 사이에는 늘 이런 일이 벌어진다. 남이 보면 왜 저러고 사나 싶게 한심한 일일지도 모른다. 만화가도 안다. 하지만 어쩌랴, 좋아서 선택한 만화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이 전부 좋기만 할 수는 없다.

프로작가로 막 출발하던 시절에는 머릿속에만 있는 이야기를 원고지에 옮겨 완성된 내 만화를 빨리 보고 싶어 마감일에 딱히 쫓기지 않으면서 부지런히 작업에만 매달리던 시절도 있었다. 원고 그리는 게 너무 재미있어서 24시간을 넘어 36시간쯤 잠도 안자고 줄기차게 달린 뒤 완성된 원고를 싸들고 출판사까지 다녀오면 피곤함도 잊고 뿌듯하던 기억도 희미하지만 남아있다. 한창 나이였고 기운도 남아돌았던 희망찬 스무살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리 없는데, 그 시절엔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작업이 익숙해지고 마감은 피곤이 채 풀리기 전에 돌아오며 즐겁게 그리고 싶었던 만화는 어느새 시간에 맞춰 마음에 들건 말건 무조건 끝을 내야한다는 압박에 부딪친다.

게다가 컨디션은 나이 먹을수록 점점 좋아지기 어렵다. 피곤하면 눈에서부터 증세가 나타나 뿌연 시야가 난시와 비슷한 상태라 그럴 때는 뭘 해도 소용이 없어 일단 충분한 수면부터 취했다. 이것이 오랜 습관으로 굳어진 체질이라 믿었지만, 이제는 아무리 잠을 많이 자도 시야가 또렷해지는 일은 드물고 난시는 만성이 되어 안경을 써야하며 피로회복 또한 죽은 뒤에나 가능할 미션이 되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모티브에 영감을 얻는 일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는다. 가만있어도 온갖 아이디어가 떠오르던 시절은 너무 오래 전에 멀어졌고 이제는 억지로라도 머리를 쥐어짜고 유행과 대세를 참고해서 공식에 따라 스토리를 만들어 내야한다.

그래서 마감 때마다 늘 같은 일이 반복된다. 빈둥거리면서 최대한 힘을 비축하다가 마감에 맞춰 전력질주하기. 사실 이미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여전히 저 패턴에 내가 맞출 수 있다는 헛된 믿음으로 딴짓은 반복된다. 그렇게 마감을 피해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계속 청소를 하거나 게임을 하면서 원고 작업은 계획한 완성도에서 하나씩 내버리고 최후의 알량한 자존심만을 남겨 간신히 담당자에게 완성된 원고 파일을 메일로 보내주고 나면 또 다시 다음번 마감이 남는다. 그리고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된다. 이번엔 꼭 원고를 미리 당겨서 해두고 다른 연재물 구상이라도 해두는 걸로 하자. 하지만 아직은 많이 남았으니 일단 잠이나 자야지. 청소 못했는데 자고 일어나서 할까 말까. 계획은 여전히 많고 마감일은 돌아오지만 이루어지는 것은 별로 없다. 원고 과정이 이제는 너무 뻔하고 정해져있는데 그걸 피해갈 방법이 없고, 이야기를 상상하면 재미있고 기대도 되지만 막상 시작하고 보면 내 그림은 상상보다 못해 낙담하고 체념한다. 그리고 현실도피를 꿈꾸다가 쫓기며 허겁지겁 달린다. 만족스런 마감이란 결국 이룰 수 없는 꿈과 같은 것이다.

오경아
클래식 음악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있는 만화가. 현재 봄툰에서 [마녀와 집사]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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