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아시아의 힘], 박정희 시대 넘어서기

2016.12.30
점심은 모르겠고, 역사에는 확실히 공짜가 없다. 가불에는 언제고 청구서가 날아온다. 현기증 나게 빨랐던 우리의 압축적 성장은 세계사에 유례없던 굉장한 가불이었으니, 굉장한 청구서가 온들 이상할 게 뭐람. 우리는 박정희식 경제 모델을 제대로 비용을 치러 가며 우리 손으로 기각한 적이 없다. 그보다는 그저 다른 모델로 반쯤 강제로 옮겨 탔다. 그 옮겨탄 모델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자, 한 때 잘 작동하였고 우리 손으로 기각한 적 없었던 박정희 모델을 다시 불러오자는 주장이 당연하게도 분출했다.

이렇게 해서 박근혜 정부는 뜻하지 않게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박근혜 정부는 일종의 후불 청구서였다. 이 후불 청구서 정권의 본질은, 창조경제와 혁신을 내걸되 그마저도 정부가 틀어쥐는 미래지향형 촌티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 정부 수반이 직무정지에 처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정산을 끝내는 것이다. 박정희 모델이 과연 무엇이었고, 그것이 왜 한 때 제대로 작동하였으며, 왜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지, 좁은 전문가 사회를 넘어 시민들이 공적 합의에 도달할 때 정산이 끝난다.

저널리스트이자 개발경제 연구자인 조 스터드웰이 쓴 [아시아의 힘]은 우리의 정산을 도와줄 아주 논쟁적인 발제문이다. 동아시아 경제 기적의 원인을 찾아 나선 저자는 르포르타주와 학술연구를 신기할 정도로 손쉽게 넘나들며 독자를 기적의 설계도로 안내한다. 스터드웰이 보기에 동아시아는 경제학 원리를 무시한(!) 좋은 개발전략 덕분에 기적을 만들어 냈다. 대농장 대신 소농 정책으로 농업국가 단계에서 이륙하고, 농촌인구를 흡수할 산업정책을 국가 주도로 전개하고, 금융조차도 산업정책에 종속시킨다. 하나같이 경제학이 가리키는 반대방향이다.

이런 식의 전방위 정부 개입은 물론 대규모 지대(특혜성 수입)를 발생시킨다. 이론의 여지 없이 지대는 경제의 활력을 죽이는 암세포다. 오케이. 스터드웰은 굴하지 않고 이렇게 쓴다. “부국이 아니라 성장 중인 국가에서, 지대를 제거하고 기업인들이 낭비적인 투자 대신 경제개발에 복무하게 만들 수 있나. 박정희가 살아 있다면 분명 ‘그럴 방법은 없다’라고 답했을 것이다.” 개발국가와 부자 국가의 구동 원리는 다르다. 그러니 개발국가라면 경제학은 잊고 역사가 검증해준 개발전략에 집중하라! 책이 내놓는 핵심 메시지다.

이는 자체로 전문적인 논쟁이 한창인 주제다. 하지만 여기서는 스터드웰의 핵심 메시지를 뒤집어 보는 걸로 충분할 것 같다. 개발국가가 부국에 도달하면 기존 구동 원리에서 졸업해야 한다. 산업정책을 완화하고 보다 개방적인 경제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이 반드시 온다. 우리는 이미 부국이다. 정부가 지대를 이용해 민간을 유인하는 시스템은 부국의 도구가 아니다. 박정희 모델의 본질과 작동 메커니즘을 높이 평가하는 이 책은, 박정희 시대를 진정으로 끝내려는 지금 오히려 더 읽혀야 한다. 그것이 잘 작동하였다는 주장을 깊이 이해하여야,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제대로 짚을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정부가 보낸 후불 청구서를 우리가 아주 싸게 막았다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더 나쁜 가능성, 그러니까 경제 시스템이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지거나, 남북관계가 터무니없이 파탄 나거나, 아예 헌정체제가 후퇴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고 느낀다. 거기까지 가기 전에, 결정적 시기에 우리 동료 시민들이 정부를 멈춰 세운 놀라운 능력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웠다. 그래도 청구서를 또 받고 싶지는 않다. 다음에도 기적이 우리를 도우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러니 또 이자가 붙기 전에, 이번 기회에 정산을 끝내는 게 좋겠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14개월 동안 사회 기사를 썼다. 2016년 1월부터 경제와 국제를 취재한다. 쟤도 뭐 하나는 사람답게 하는 게 있겠거니 기대를 버리지 않는 조직에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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