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계단], 채사장에게 온 특이점

2016.12.30
채사장의 신간 [열한 계단]은 그가 닿은 일종의 특이점처럼 보인다. 팟캐스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하 [지대넓얕])과 동명의 책을 통해 다양한 지식과 학문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효율적인 지식 지도를 제공했던 그는, 현실 인문학을 표방한 [시민의 교양]을 거쳐 이번 [열한 계단]에선 열여덟에 읽은 [죄와 벌]부터 출발해 니체와 맑스를 거쳐 고대의 경전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책들을 소개한다. 어떤 면에선 기존의 작업과 비슷해 보이는 이 책은, 하지만 지식 자체보단 지식을 통해 자아를 구성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중요한 건 [죄와 벌]이나 [공산당선언] 같은 책의 이름이 아니라, 그때그때 자신에게 불편한 지식을 접하며 세상을 넓혀가는, 채사장의 표현을 빌리면 ‘여행자의 영혼’을 삶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채사장은 기존 강연에서 인문학의 본질이 우리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것에 있으며 행복하고 자아를 찾는 삶을 사는 것이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식보단 지혜를 강조하는 [열한 계단]은 이러한 맥락 위에 있는 책으로 보인다. 채사장은 우월감을 주는 지식 대신 자기의 인생을 더 폭넓고 행복하게 해줄 조력자로서의 지식을 제안한다. 책 [지대넓얕] 역시 타인과 상호이해하며 대화할 수 있는 공통의 교양을 제공하려 했다는 점에서 [열한 계단]에서의 채사장은 변심했다기보다는 기존의 문제의식을 심화한 것에 가깝다.

하지만 채사장의 기획은 지식의 전달에서 현실에 대한 제언으로 범위를 확장하면서 균열을 드러낸다. [지대넓얕]에서 오해 없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지식의 사조를 위계 없이 소개하던 채사장은 [시민의 교양]에서 어떤 지식을 취할 것이냐를 마치 선택의 문제처럼 이야기한다. 가령 그는 한국사회의 갈등 원인을 절대주의 세계관에서 찾으며 “고정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상대주의와 여기서 파생되는 다양성에 대한 담론”의 중요성을 말한다.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는 단순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논증을 통해 어떤 세계관을 긍정적인 것으로 제시하기보단 “소통의 시작은 내가 타인의 세계관을 논박하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다시 말해서 타인이 나와는 정말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인정할 때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서로 논박할 수 없는 세계관으로 예시한 수직적 정의관(차등 원칙)과 수평적 정의관(평등 원칙),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가 평등 원칙 안에 차등 원칙까지 포함해 설명한 존 롤즈나 자유의 삼항 구조로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의 이분법을 지운 맥컬럼을 통해 반박된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틀린 말이다. 소통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이들조차 공유하는 대화의 논증 규칙이 없다면 아예 존재할 수 없다. 논박과 논증은 소통의 여러 방식 중 하나가 아니라 소통을 가능하게 만드는 본질적인 요소다. 논박이 불가능하려면 논박이 불가능하다는 논증이 선행되어야 한다. 소통과 타협을 위한 상호존중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옳고 그름의 기준까지 상대화한 채사장은 정작 소통과 합의를 가능하게 하는 소통적인 합리성을 놓치며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현실에 대한 제언을 넘어 삶의 방법론을 제안하는 [열한 계단] 역시 이러한 상대주의의 맥락 위에서 표류한다. 불편한 지식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가자는 [열한 계단]의 목표는 훌륭하지만, 이러한 넓은 자아를 위해 채사장은 각각의 지식이나 신념 체계 사이에 벌어지는 충돌과 논쟁을 강박적으로 화해시킨다. 가령 그는 기독교인이 불편함을 참고 불교나 힌두교의 내적 논리의 탄탄함을 인정하게 됐을 때 더 넓은 존재인 종교인이 되는 과정을 예시로 든다. 그는 종교적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길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없다. 다만 그 반대도 문제는 아니다. 아무리 숙고해도 유일신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니면 유물론적 관점에서 종교적 구원을 검토하고 거부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서 한 개인의 사상적 체계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생각이 좁아지는 것이 아니라 반론을 상대하며 생각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다. 중요한 건 넓어지느냐 깊어지느냐 하는 추상적인 방향 설정이 아니라, 각 근거를 종합해 무엇이 더 합리적이고 합당한지 판단하는 과정의 철저함이다. 하지만 이미 [시민의 교양]에서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졌던 그는 이러한 합리성마저 부정한다. 그는 사후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의심에 대해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 넣”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것 역시 강요된 화해다. 근현대 안에서 수많은 미신과 오류, 잘못된 믿음을 극복하고 합리적 인간 이성이 어떻게 발달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합리성과 영성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처럼 논쟁의 영역이 아닌 선택의 영역으로 취급된다.

하여 안타깝게도 여기에 지적 대화는 없다. 정확히 말해 지적 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합의된 논증 규칙과 그 바탕이 되는 합리성의 근거가 없다. 그가 [열한 계단]에서 다루는 신비주의 자체가 반지성적인 것은 아니지만, “삶의 의미”라는 추상적 가치를 근거 삼아 논증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반지성주의에 가깝다. 지혜 앞에서 지식의 겸손함을 강조하던 대중적 지식인은 지혜를 다루는 과정 중 지식 앞에 오만했다. 다양한 지식을 위계 없이 소개하는 것과 다양한 지식의 차이와 균열을 실천적으로 무시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지적 대화의 공통 분모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꼭꼭 씹어 전달한 [지대넓얕]의 겸손한 성과는 [열한 계단]에서 결과적으로 부정된다. 물론 하나의 사적인 에세이이자 삶의 방식으로서 그가 오른 열한 계단을 부정할 수는 없다. 삶의 지혜를 모색하는 진지한 태도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다만, 그와 함께 ‘여행자의 영혼’이 되어 그가 제시하는 길의 계단을 함께 내디뎌도 될지는 모르겠다. 당장 합리주의라는 가장 튼튼한 디딤돌부터 제거된 계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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