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도 ‘플스’를 하느냐고요?

2017.01.06
내 취미는 게임이고 나는 여성이다. 스스로를 여성 게이머로 정의해본 적은 없지만 세상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이렇게 손을 흔들 수밖에 없다. 저기요! 여기 사람 있어요!

내 게임 인생은 평화로웠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일본 출장을 다녀오며 닌텐도 패미콤을 사 왔다(하하! 재믹스만 갖고 있던 놈들 한 방 먹어라). 286 컴퓨터가 생긴 이후로는 각종 컴퓨터 게임을 했다. 뭐 뻔하다. [프린세스 메이커](역시, 하는 소리가 들리는군), [삼국지] 1, 2, 3, 4, 5, 6, 7, 8, 9, 10, 그 외 많은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들, [원숭이 섬의 비밀] 같은 고전 명작들, 재미있으라고 만들어 놓은 것을 재미있게 플레이 했다. 제일 빠져든 장르는 롤플레잉 게임이었다. [어스토니시아 스토리]로 한국 롤플레잉의 미래를 봤고(아직도 어스토니시아가 무슨 뜻인지 잘 모르지만), [창세기전]을 플레이하다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기쁜 마음으로 콘솔로 넘어갈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은 아름다웠다. 바야흐로 첫 플레이스테이션2용 [슈퍼로봇대전 임팩트]가 발매되었고, [파이널판타지 10]에서는 유우나가 춤을 추었다. 내가 이런 말을 왜 하는가. 그 이유는,

항상 내가 ‘순수한 게이머’임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세상에나 순수한 게이머라니. 그게 무슨 말이람. 심지어 나는 별로 증명하고 싶지 않다. 누가 본인이 오타쿠임을 증명하고 싶을까(물론 전 오타쿠가 아니지만요). 이러나저러나 게임 얘기가 나올 때마다 나의 순도(?)를 증명해야만 했다. ‘게임을 한다고? 네가? [카트라이더]나 남친 옆에서 좀 하겠지? 아니라면 좀 특이한 사람인 척하고 싶은 게임 공력도(으악 이런 표현이라니) 낮은 기지배겠지?’ 

아아, 실제로 카트라이더를 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나는 [진 삼국무쌍]으로 천 명 베기나 하고 있었다. ‘아니… 저는 [진 삼국무쌍]… 뭐 그런 거…’ 정도에서 ‘즐겜요!’ 하고 다음 대화로 넘어가주면 좋았을 텐데. 여자가 그런 ‘남자용’ 게임을 진심으로 즐길 리 없다고 믿는지 그 후 지난한 사상검증의 대화가 이어지곤 했다. 내겐 대화를 끝낼 수 있는 마법의 문장이 있었다. 그래요. 우리 집에는 플레이스테이션 2, 3, 4 그리고 엑스박스360, 게임큐브 wii가 세 대(국가 코드랑 [슈퍼마리오 레드 에디션] 때문에요), 그리고 wiiU, 휴대용으로는 PSP, PS VITA 그리고 닌텐도 3DS가 여러 대 있죠. 이 문장으로 그들 마음속의 알 수 없는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 같았지만, 애초에 내가 왜 내 취미의 진정성을 그들에게 증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대상이 홍차나 그릇이었다면 안 그랬을 것이다.

내가 게임을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수많은 게이머들과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재미있고 머리를 비울 수 있고 혼자 가만히 앉아 조용히 할 수 있다. 롤플레잉의 경우에는 캐릭터가 성장하는 것도 기쁨이다. 맑은 하늘 아래 동료들과 초원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도 좋다. 평화롭고 정의가 이기는 세상이다. 내 실력이 낮아도 ‘노가다’를 하면 큰 적을 쓰러트릴 수 있다. 내가 괴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재미있으라고 만들어놓은 것을 재미있어할 뿐이다. 단지 게임을 잘 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컸을 뿐이다. 오빠가 플레이하다 만 게임의 엔딩을 조용히 보는 그런 아이였을 뿐이다.

게임 게시판에서 종종 이런 글을 본다. ‘게임 하는 여친이 있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감히 추측하건데 당신이 바라는 것은 당신이 게임을 하는 옆에서 ‘우와, 이게 머야, 오빠 짱 잘한다’ 하며 말해주는 여성, 또는 당신이 가르쳐주는 조작법을 잘 숙지하지 못하고 쩔쩔매어 당신에게 잘난 척할 기회를 주는 여성, 또는 당신이 게임에 빠져 있다가 문득 현실로 돌아왔을 때 잠든 고양이처럼 곁에 있어 줄 여성이지 ‘야, 거기서 미적거리지 말고 잘 따라오란 말이야, 말 세워놨으니까 타고 와, 여기 장독 깼으니까 만두 먹어’ 하고 말하는 Kill수 2배 넘는 여성이 아닐 것이다. 겪어보고 하는 말이다. 얼마나 많은 게이머 ‘여친’이 오늘도 게임 못하는 척을 하고 있을까. 얼마나 많은 다이아 티어 여성들이 아야아야 하고 죽으며 몰래 한숨을 쉴까. 멀리 갈 것도 없다. 신급 플레이를 했던 게구리 씨의 성별을 둘러싸고 얼마나 한심한 얘기들이 오고 갔는가. 

앞 소개에 빠트린 말이 있는데 나는 결혼을 했다. 유부녀 게이머이다. 이 또한 이상한 분류이지만 이런 글이니 어쩔 수 없지. 남편도 다행히 게이머여서 저런 풍요로운 콘솔 환경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취미가 달랐다면 우리 집에는 플레이스테이션4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릇을 예로 들어보자. 내가 어느 날 “안녕, 나의 남편, 나 웨지우드 도자기 8p를 샀어. 매번 여기에 밥 먹으면 되니까 실용성도 있어. (사실 없다) 자기도 분명 좋아할 거야. 이것저것 같이 질렀더니 백만 원이야. (화를 내자) 이미 배송 중이야. 용서해줘. 내가 잘할게.”

누군가는 다이소에서 산 밥그릇으로 먹는 밥이나 웨지우드로 먹는 밥이나 똑같은 밥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존중한다. 고로 나는 웨지우드가 얼마나 좋은 것이고 가치가 있고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남편과 얘기했어야 했고 그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구매를 접는 게 맞다. ‘넌 어차피 이해해주지 못할 테니’라는 말은 웨지우드 그릇에도, 상대방에게도 모욕이다. 더 심각한 부분은 웨지우드는 날 배우자에게서 뺏어 가지 않는다. 나는 웨지우드를 바라보며 매일 2시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플레이스테이션4는 그렇지 않다. 플레이스테이션은 사람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데려가주는 마법의 기계이다.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다. 분노하는 지점은 여기다. 왜 소니코리아는 헛소리를 하는가. 플레이스테이션4를 아내 몰래 지르라고? 허락받는 것보다 용서받는 것이 낫다고? 이것은 모두에 대한 모욕이다. 존재가 지워진 여성 게이머들에 대한 모욕이고 상의도 없이 큰 지출을 한다고 매도되는 성인 남성들에 대한 모욕이고 그 장점을 이해받지 못할 거라 낙인찍힌 플레이스테이션4에 대한 모욕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나의 플레이스테이션4를 블루레이 플레이어라 속이며 ‘허락’받지 않길 바란다. 그녀가 플레이스테이션의 장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은 당신의 게으름이자 오만이고 무엇보다 플레이스테이션은 그렇게 소개될 물건이 아니다. 아, 웨지우드 그릇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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