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쇄를 찍자!]와 [중쇄미정], 출판 편집자는 그래도 책을 만듭니다

2017.01.06
“책이 팔릴 리 없어.”
[중쇄미정] 표지에 쓰인 말풍선을 마주하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볼드모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말해버린 호그와트 신입생처럼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안 돼. 그런 무서운 진실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돼.

최근 ‘중쇄’라는 다소 낯선 단어를 포함한 두 종의 만화를 읽은 독자라면 너무나도 상반된 톤의 이야기에 어리둥절한 기분에 사로잡힐 것이다. 유도 선수를 꿈꾸던 쿠로사와가 출판사 코토칸 만화편집부의 편집자가 되어 고군분투하는 [중쇄를 찍자!], 약소출판사 표류사의 말단 편집자(이름도 없다)의 일상을 다룬 [중쇄미정]. 출판사 편집자 이야기라는 점에서 설정과 배경은 유사하지만 전자가 ‘우리 열심히 해서 중쇄를 찍자!’는 파이팅이 넘친다면, 후자는 ‘무리야, 무리. 중쇄는 미정이라니까’ 하고 시큰둥한 대답을 던지고 의자를 빙그르르 돌리는 것 같다.

자신이 몸담은 출판업이 만화의 주요 무대라는 반가움에 [중쇄를 찍자!]를 집어 들었을 한국의 편집자들이라면 한결같은 의식의 흐름을 경험했을 것이다. 신입편집자 쿠로사와의 열정이 정말 대단한데. 나도 한때는 저런 투지와 의욕이 불타오를 때가 있었지, 하하. 나까지 불끈불끈 힘이 솟는군. 작가와 함께 성장하는 편집자라니, 정말 꿈같은 일이지. 꿈같은 일. 그래, 그런 꿈같은 일은 현실에서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잖아. 난 안 돼, 틀렸어. 무리야, 무리. 현실인 줄 알았는데 이것이 나의 현실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무렵 엄마 미소는 희미해지고 피로감이 몰려오는 것이다. 현역 편집자이자 작가인 [중쇄미정]의 저자 역시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중쇄를 찍자!]의 팬을 자처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잘나가는 대형출판사, 즉 ‘메이저’만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자신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중쇄를 찍자!]의 편집자 쿠로사와는 납득할 수 있는 기획서를 쓰기 위해 머리를 싸매다가 농담처럼 “지금 제가 읽고 싶은 만화”라고 써놓고 핀잔을 듣지만 [중쇄미정]의 주인공은 “제가 읽고 싶습니다. 팔리든 말든 알 바 아니에요”를 쿨하게 외치고 편집장도 쿨하게 오케이 한다. 잘 팔리는 책을 내는 것 이전에 우선 팔 책이라도 있어야 배본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작은 출판사의 현실이 반영된 장면이다.

[중쇄미정]의 주인공은 중쇄를 팡팡 찍어내는 유능한 편집자가 되고 싶지만 역시 편집이 가장 귀찮고, 편집장은 전년도 결산이 엉망이라서 청주를 병째 들고 돌아다니며, 직원들은 적자 누적의 책임이 너한테 있네, 나한테 있네 결투를 벌이며 살림을 걱정하는데 한량 같은 사장님은 어차피 출판은 돈벌이가 안 되니 문화를 만드는 데나 일조하라고 속편한 소리만 늘어놓고 사라진다. 장면 하나하나가 출판노동자들에게는 어제의 사건, 오늘의 일상, 내일의 현실이어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가만, 이 책의 장르는 르포가 아닌가’ 의심하게 된다.

반품 전까지는 매출이다, 출간 계획은 원래 터무니없는 것이다, 오자는 책의 꽃이다 같은 황당한 주장이 난무하고, 독자의 환상을 깨트릴 법한 도시전설 같은 에피소드들이 이어지지만, 인물들의 대사에는 나름의 직업정신이 녹아 있다. 편집장은 어떻게 하면 친절한 소제목을 붙일까 고민하는 주인공에게 “소제목이란 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일일 뿐”이라며 “비위 맞춰서 키운 독해력은 결국 우리가 대가를 치러야 해. 편집자가 그런 걸로 애써봤자 독자는 미아가 될 뿐”이라고 일갈한다. 그래서 일본 직업만화 특유의 ‘꿈을 향해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파이팅 모드’나 ‘존경할 만한 위대한 스승의 소중한 가르침’ 같은 건 1도 없지만 같은 업계인으로서 어쩐지 더 힘이 나는 것이다. 한 번쯤은 열혈 편집자 쿠로사와에게도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마. 자살하면 안 돼” 하고 다정하게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언제부터 ‘출판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각광(?)받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누구도 알 수 없고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던 저자와 완성된 책 사이의 일들이 이렇게 조금씩 수면 위로 드러나곤 하지만, 역시 편집이란 제대로 하지 않으면 금방 티가 나고 잘 해도 누가 알아주지 않는 수면 아래의 일이다. 열정과 진심이 활활 타오르는 형태건, 적절한 포기 속에 스며든 무심한 욕심의 형태건, 중쇄를 찍어보겠다는(책을 더 많이 읽혀보겠다는) 출판노동자들의 열망은 언제나 들끓고 있다. 그러니 언제 얼마나 중쇄를 찍을 수 있을지는 미정이지만 어떻게든 중쇄를 찍을 수 있도록 달려보자는 코토칸과 표류사의 편집자들을 만나는 일은 그저 즐겁고 기쁘다. 책이 팔릴 리 없지만 그래도 책을 만들겠다는 이상한 고집과 모순된 꿈을 가진 자들이 존재하기에 지금 우리가 이 책의 책장을 넘길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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