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콘] ‘대통형’,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2017.01.09

“병신년이 가고 2017년 정유라가 왔습니다.” 최근 문제가 되어 당사자가 사과했던 모 국회의원의 트위터 발언이 아니다. 그보다 하루 전인 1월 1일 KBS [개그콘서트](이하 [개콘]) ‘대통형’ 코너에서 대통령 서태훈이 읽은 대국민 신년사다. 명백하게 탄핵 소추된 박근혜 대통령을 겨냥한 이 말에 포함된 장애인 혐오, 여성 혐오의 맥락을 2016년이 끝난 지금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저열한 개그다. 하지만 해당 방송에 대해 다수의 연예 매체는 ‘사이다’, ‘날선 풍자’ 같은 호의적 평가를 남겼다. 이것은 안일한 리뷰다. 저열함과 안일함이 더해지는 상황에서 퇴행하지 않기란 어렵다. 시국 풍자 개그를 표방하는 지금의 ‘대통형’이 그렇다.

위에서 인용한 에피소드에서 청와대에 출석한 조여옥 대위와 그를 감시하는 듯한 이슬비 대위의 모습을 패러디한 것처럼, ‘대통형’의 시국 풍자는 기본적으로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밝히는 과정에서 나오는 황망한 팩트들을 거의 그대로 차용한다. 대통령이 피곤하다고 하면 국무총리 유민상이 백옥주사, 마늘주사 등 다양한 주사를 꺼내들고, 총리에게 간만에 ‘카톡’ 메시지가 와서 확인하면 국민들의 비난 메시지인 식이다. 이에 더해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 이은재를 패러디한 창조경제부 장관은 갑론을박이 벌어질 때마다 “사퇴하세요!”를 외친다. 이것은 ‘대통형’보다 앞서 시국을 풍자하던 코너인 ‘민상토론 2’에서 유민상의 퀴즈쇼 우승에 대해 “문고리 3인방으로부터 문제 유출” 의혹을 제기하던 것과 비슷한 패턴이다. 웬만한 상상력과 개그 센스로도 따라잡기 힘든 현실의 재료를 있는 그대로 활용하고 싶었던 걸까. 이 정도면 상을 타겠지 하고 자기들끼리 깔깔대고 짠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조별 콩트 수준의 게으른 패러디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결과적으로 정치 혐오에 복무한다는 점에서 더 문제적이다.

대통령과 내각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 정치 혐오는 아니다. 중요한 건 무능함의 본질을 짚어내느냐, 무능함을 놀리는 데 그치느냐다. 가령 [심슨 더 무비]에서도 대통령이 된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멍청함을 마음껏 조롱한다. 다만 여기엔 현실 정치에서 그를 주지사까지 오르게 한 정치적 파퓰리즘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자신의 인기와 터프가이 이미지에 집착하느라 마을 폐쇄와 핵무기 사용에 거리낌 없는 근육질 바보 대통령에 대한 묘사는 파퓰리즘에 속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가 된다. 국내 코미디로 눈을 돌리면 과거 KBS [유머1번지] ‘꽃피는 봄이 오면’에선 콜레라 발생에 대해 콜레라는 전형적인 후진국 병이기 때문에 우리를 선진국이라 생각하고 가해지는 자유무역 압박에 대한 방어논리로 쓰자는 방역당국의 모습을 그린 바 있다. 당국의 무능함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들의 그럴싸한 변명의 패턴을 비틀어 이것이 얼마나 정치적으로도 후진적인 상황인지 더욱 선명히 밝혀냈다. 무슨 일만 있으면 국민을 종북으로 모는 ‘대통형’의 유민상 총리(현재는 권한대행) 역시 현실의 부조리를 지적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론분열은 북한에게만 좋은 일이라는 논리가 수십 년 동안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사회에서 “평양냉면 좋아해도 종북이냐”는 비판은 실제 수구 세력의 종북 및 반공 논리에 어떠한 타격도 가하지 못한다. 이 부조리가 어떻게 가능했는가, 라는 질문이 빠진 부조리 비판이나 희화화는 어떤 날선 표현을 쓴다 해도 결과적으론 허수아비 화형식이 될 뿐이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의 이미지를 비웃고 치운다면 당장은 후련할지 모르지만 정작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은 증발한다. 이것이 정치 혐오다.

‘정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빠진 자리를 채우는 것은 결국 표현의 강도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낮은 인권 감수성을 감안하더라도 앞의 ‘병신년’ 발언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방송의 건전성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다. 그래서 과연, 이것이 재밌나? 권력 잃은 대통령을 소재 삼아 놀리거나 비판할 수 있다. 다만 그들은 정작 이렇게 무능하고 나쁜 대통령에게서 권력을 빼앗아 풍자 개그 하기 좋은 날을 만들어준 광장 민주주의와 성숙한 정치의식에 대해선 놀라울 만큼 무지해 보인다. 이제 시민들은 이게 다 대통령 탓이다, 이게 다 정치인 탓이다, 라고 말하는 대신 각각이 원하는 삶의 모습을 구체적인 정치적 구호와 참신한 깃발로 표현하고 정치인과 동료 시민과 언론에게 요구한다. 풍자든 비판이든 욕이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당위와 전망 위에서만 정당화된다는 사회적 합의 역시 좁은 범위에서나마 조금씩 이뤄지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으로 성숙해져가는 시민이자 시청자들 앞에서, 세월호 유족에겐 또 다른 트라우마로 남을 올림머리 미용 90분을 그대로 개그 소재로 쓰고 새해부터 ‘병신년’ 소리나 하면서 정말 재밌거나 통쾌하길 바라는 걸까. 이것은 권력이 무너진 지금에야 나올 수 있는 뒤늦은 풍자가 아니라, 지금이기에 나와선 안 되는 퇴행적인 자기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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