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드 창, 세계의 창조자

2017.02.15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이다. 업계에서 인정받는 저명한 작가가 쓴 재미있는 소설이 영화화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이상한 일일까. 하지만 테드 창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고, 또 그가 속해 있는 SF 장르에서는 이런 종류의 각색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일급의 SF 소설이 온전한 모습으로 각색된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한번 보라. 의외로 많지 않다. 얼핏 보면 SF는 현란한 스펙터클과 액션의 재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장르는 조금만 진지해지면 오로지 언어로만 가능한 사변의 세계에 빠진다. 그 때문에 베스트셀러 작가이면서 의외로 영화화가 안 되는 작가들이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대표적이다. 없지는 않지만 영화판 [바이센테니얼 맨]이나 [아이 로봇]을 대단한 성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치밀함과 집중력이 아시모프의 몇 배는 되는 테드 창의 경우는 더 힘들다. 물론 그의 작품이라고 스펙터클이 없는 건 아니다.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다룬 [바빌론의 탑]을 읽는 독자들은 머릿속으로 하늘까지 닿는 탑의 어마어마한 그림을 그린다. 드라마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일흔두 글자]는 명명학이 진짜 과학인 평행우주를 다룬 신나는 모험담이고, [지옥은 신의 부재]는 천국과 지옥이 진짜로 존재하고 모든 이가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세계 속에서 갈등하는 사람들을 다룬다. 이 단편 속 드라마와 액션은 모두 충분히 영화화될 수 있는 재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신은 남는다. [일흔두 글자]에 나오는, 폐기된 철학과 과학이 살아 숨 쉬는 판타지 영국은 분명 매혹적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다루는 평행우주의 법칙과 이론들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결국 언어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든다면 각각의 페이지 안에 극도로 압축된 이론들을 읊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테드 창의 소설들은 드라마보다는 세계관의 설명과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가를 계산해 치밀하게 그려내는 과정이 드라마나 액션보다 더 중요하다. 그 과정이 진짜로 재미있어서 독자들은 신경 쓰지 않지만 각색자의 경우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컨택트]의 원작이 된 [네 인생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이 소설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모두 지구에 온 외계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려는 언어학자의 머릿속에서 벌어진다. 한마디로 연구 과정의 기록인 것이다. 소설이 진행되는 동안 독자들은 언어학과 물리학의 접경에서 뜻밖의 결론과 마주치고, 작가는 이를 아주 교활하게 화자의 인간적인 드라마와 연결시킨다. 그 인간적 드라마가 의외로 강렬하기 때문에 이 작품이 영화화된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대부분이 이론의 설명과 그에 바탕을 둔 추론의 과정에 대한 묘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컨택트]를 보면 의외로 원작의 의도를 배신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소설은 외계인 우주선의 묘사나 그들의 방문 때문에 발생한 소동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으며 거의 얄미울 정도로 외면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럴 수 없다.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은 테드 창이 쿨하게 버린 재료들로 만들어졌다. 주인공 루이스(에이미 아담스)가 외계 우주선과 처음 만나는 장면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잉여이다. 그건 외계인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려는 중국과의 갈등, 이를 해결하기 위한 루이스의 액션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마지막 것은 인과율의 파괴를 스토리 진행의 편의를 위해 써먹고 있기 때문에 원작의 순수성이 가장 확실하게 깨지는 부분이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컨택트]의 성과는 여전히 놀랍다. 일단 이런 타협을 통해서라도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놀랍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이런 각색의 과정이 어쩔 수 없는 타협이나 잉여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원작이 클리셰를 피하기 위해 외면한 재료를 그대로 가져와 적극적으로 써먹었다고 해도 영화에서는 원작인 소설과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는다. 그러는 동안 원작의 많은 부분이 날아가긴 하지만(물리학이 가볍게 다루어지고 페르마의 원리가 언급되지 않는 건 여전히 아쉽다) 원작의 재료로 만들어진 이 영화 속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아름답다. 

다시 생각해보니 테드 창은 생각보다는 각색되기 쉬운 작가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스토리텔러라기보다는 세계의 창조자다. [네 인생의 이야기]가 쌓아놓은 세계에서 [컨택트]가 그렇게 융통성 있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그 세계의 힘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가 만든 세계들에도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탐구해보는 것 또한 재미있지 않을까? 이 경우는 영화보다 텔레비전 시리즈가 더 그럴싸할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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