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왜 지금 지리학인가], 도널드 트럼프 씨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2017.02.17
철학과 출신 친구를 놀리고 싶은가? 생년월일시를 읊으며 사주를 봐달라고 하면 된다. 사학과 출신은, 내가 당해봐서 아는데, “사자왕 리차드랑 초패왕 항우가 싸우면 누가 이겨?” 류의 질문에 뒷골이 당긴다. 경제학과에게는 돈 될 주식을 찍어 달라고, 정치학과라면 다음 대통령을 찍어 달라고 하자. 지리학은 어떨까? 글쎄, 집의 풍수를 봐 달라고 해 볼까? 나는 ‘리아스식 해안’이 뭔지 지금도 궁금하다. 왜 중‧고교 내내 지리를 배웠으면서 기억나는 지리학 용어가 저거 하나인지도. 일단 지리학은 이과야 문과야? 제래드 다이아몬드가 지리학자라니, [총, 균, 쇠]가 지리학 책이었어?

지리학자 하름 데 블레이에게는 이게 웃자고 하는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 지금 지리학인가]는 이 학문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비전공자 눈높이에 맞춰 안내하는 역작이다. 물론 투덜거림을 잔뜩 섞어서다. 데 블레이가 보기에, 지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공간’이다. 역사가 시간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지리학이란 세상을 공간으로 바라보는 학문이다. 이 대가는 비행기 옆자리 사람과 대화를 할 때마다 “지리학자라고요? 멋지군요! 그런데 지리학이 뭐죠?”라는 질문을 평생 들어왔다. 그러니 저런 간명한 정의가 나왔겠지.

책은 기후변화부터 테러의 기원과 국제적 감염병을 거쳐 중국의 부상까지, 지질학과 지구과학과 국제정치학과 보건의학과 경제학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주제를 종횡무진 일주한다. 이 방대하고 거의 서로 무관해 보이는 주제를 ‘공간’이라는 지리학의 렌즈로 보았을 때, 아주 색다르고 설명력 높은 통찰이 등장한다. 물론 지리학이 다음 테러 발발 지역이나 글로벌 감염병의 종류를 예측하지는 못한다. 그런 건 속류 지리결정론의 허세에서나 가능하다. 하지만 어디가 왜 테러와 감염병에 취약한 지역이고, 정책 입안자들이 어떤 요소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짚어주는 데는, 공간이라는 렌즈가 아주 위력적이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공간이 놀랍도록 작아지는 시대다. 이동 속도는 어느 때보다 빨라졌고, 온라인 연결망은 그보다도 극적인 압축을 만들어 냈다. 1세계 국가 원주민이 몰려드는 이민자를 싫어할 수야 있다. 하지만 공간의 렌즈로 보면, 그건 세계가 유례없이 작아진 결과물이다. 그리고 극적인 공간 압축으로부터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것도 1세계다. 그 누구도 이득을 유지하면서 이민을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는데, 그걸 시도하는 자의 힘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공간을 압축하는 동시에 부풀리는 모순된 결과를 동시에 낼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저기요? 도널드 트럼프 씨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데 블레이는 이 책에서 자주 한탄한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공간적 사고에 터무니없이 취약하고, 그 때문에 놀라운 재앙이 여럿 일어났으며(베트남 베트남 베트남!), 미국의 지리교육이 엉망인 이상 앞으로도 틀림없이 그럴 것이라고. 그가 트럼프 당선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게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거의 이름조차 처음 들어보는 지구 구석구석을 독자 눈앞에 펼쳐 보이는 디테일도 훌륭하지만, 공간적 사고가 무엇인지를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기에 둘러싸인 정보 홍수 시대에도 우리가 굳이 책을 읽는 이유라면, 정보 자체보다도 그걸 다룰 렌즈를 얻기 위해서가 아닐까.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14개월 동안 사회 기사를 썼다. 2016년 1월부터 경제와 국제를 취재한다. 쟤도 뭐 하나는 사람답게 하는 게 있겠거니 기대를 버리지 않는 조직에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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