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선언│② 페미니스트로 사는 게 재미있다

2017.02.28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한다는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가시밭길에 들어서는 일과 같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TV에서도, 극장에서도, 거리의 광고판에서도, 온라인에서도 온갖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피할 길 없고 정부와 공공기관에 화만 내기에도 하루가 부족하다. 페미니스트가 아니었던 어제까지의 나를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은 물론 지금 이 순간의 나조차 믿을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만 이렇게 생각하나?’라는 외로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세상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일상을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고통스럽고 피로한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가시밭길에서 돌아나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은 바로 여기서 만날 수 있었던 자유와 새로운 재미 덕분이다. 아마도 페미니스트가 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재미들, 그 일부를 고백한다.


1. 여성들이 쓴 글이 재미있다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19세기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을 위해, 그리고 20세기 한국에서 호주제 폐지를 위해 싸운 여성들은 각각 어떤 투쟁의 역사를 가졌을까. 1977년 노르웨이에서 출간된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2015년 한국에 나타난 ‘메갈리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앨리스 브래들리 셸던은 왜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라는 필명으로 활동해야 했을까. 이 모든 것에 대한 이야기가, 서로 다른 시대와 공간을 살면서도 맞닿아 있던 여성들이 쓴 책에 담겨 있다.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구성되어 있던 각종 권장도서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읽을 수 없던 세상을 계속 발견해나가는 재미는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2. 여성들의 드라마가 재미있다
안타깝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페미니스트에게 한국 드라마와 상업영화 대부분은 견디기 힘든 콘텐츠다. 여성의 존재는 지워지거나 지극히 얄팍하게 다루어지고, 여성 시청자를 타깃으로 한 작품에도 여성혐오가 지뢰처럼 뿌려져 있다. 현실이 나아지도록 촉구하는 동시에 마음을 달랠 피난처가 필요하다면 일단 넷플릭스로 가자. 놀라운 여성 영웅이 등장하는 [제시카 존스], 노년기 여성들이 우정을 나누는 [그레이스 앤 프랭키], 싱글맘의 고군분투가 담긴 가족 시트콤 [원데이 앳 어 타임], 여성 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과 [웬트워스] 등 여성이 주인공인 동시에 치열한 정치적 고민이 담긴 드라마들은 엄청나게 재미있고 그래서 더 부럽다.

3. 여성들의 목소리가 재미있다
다시 한 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페미니스트라면 한국 코미디와 버라이어티쇼 역시 거의 보기 힘들다. 여성들이 주변부로 밀려나고 미녀와 추녀의 이분법 사이에서 끊임없이 성적 대상화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고 당연히 재미도 없다. 그러니 웃긴 여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넷플릭스의 스탠딩 코미디를 찾아볼 수도 있지만,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 [독일 언니들], [씨네필은 아니지만] 등 여성들이 제작 및 진행하는 팟캐스트를 듣는 방법도 있다.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운 콘텐츠들은 아니지만 한국 미디어의 ‘주류’ 정서에서 벗어난 소재와 시각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이들만이 아니더라도, 세상에 웃긴 여자는 찾을수록 많다.

4. 여성들이 모이는 게 재미있다
세상에는 부지런하고 행동력 있는 여성들도 정말 많다. 지난 1, 2년 사이 다양한 페미니즘 세미나와 강연과 집회가 열렸고 새로운 모임이 계속해서 기획된다. 공부나 투쟁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더 많은 여성들과 모여 즐기기 위한 이벤트를 열기도 한다. 지난해 6월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여성들끼리 상영회를 열기도 했고, 11월 발족한 한국인 페미니스트 게이머 모임 전국디바협회(이하 전디협)는 박근혜 정권을 규탄하는 범국민행동 집회와 세계여성행진에 참석한 데 이어 오는 3월 오버워치 여성게이머 대회 ‘여자 나가신다’를 준비 중이다. 그리고 오버워치의 비주얼 디렉터 제프 카플란은 지난 23일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2017 D.I.C.E 서밋에서 전디협을 소개하며 이들의 활동에 찬사를 보냈다.

5. 기부 피싱이 재미있다
한국여성민우회(#2540-3838)와 한국여성의전화(#2540-1983)로 문자 한 통에 3천 원을 후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효과적으로 홍보한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후원 독려 트윗에 대해 “기부가 되는 피싱 범죄”라고 비난한 트위터리안이었다. ‘기부 피싱’이라는 놀라운 발상의 전환에 매력을 느낀 페미니스트들은 기꺼이 피싱의 희생양이 되기를 자처하며 후원 문자로 자신의 ‘덕질’ 장르를 영업하거나, 일상을 공유하거나, 소원을 빌거나, 혹은 그냥 아무 말이나 보내기 시작했고, 한국여성의전화 담당자는 이 뜨겁고도 두서없이 쏟아져 들어온 메시지들을 흥미진진하게 정리해 발표함으로써 끊을 수 없는 피싱의 굴레를 만들어냈다.

6. 텀블벅 후원이 재미있다
2월 20일, #문단_내_성폭력 기록과 피해자 지원을 위한 [참고문헌 없음] 출간 프로젝트가 텀블벅 런칭 당일 목표액 2천만 원을 돌파했다. 지난해 여성혐오 콘텐츠를 방조하는 페이스북 코리아에 대한 민사소송 자금 마련을 위한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판매 프로젝트에는 1억 3천만 원 이상이 모였고, 텀블벅에서 시작되었던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은 2016년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되었다. 어디선가 여성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군가 관련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페미니스트들이 분노의 입금과 함께 입소문을 퍼뜨린다. 연대가 기록을 만들고 목소리를 키우고 소송비와 치료비 지원이라는 실질적 힘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지켜보고, 힘을 보탤 수 있다는 데서 느끼는 쾌감을 무엇에 비할 수 있을까.

7. 생리에 대한 농담이 재미있다
‘진정한 여자가 되는 과정’이라는 말은 집어치우자. 꽃다발도 축하도 ‘아름다운 하혈’이라는 의미 부여도 필요 없다. 생리는 자궁 내막의 주기적 탈락으로 인한 출혈로, 이에 대한 가장 실감나는 비유는 ‘굴 낳는 것 같은 기분’이며, 최근 가장 폭소한 농담은 항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비행운 사진 아래 달린 ‘생리 중에 재채기할 때’라는 설명이었다. 여성의 몸에 대해 여성들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 일인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게다가 ‘생리대’라는 말만 들어도 충격과 수치심을 느낀다며 제발 ‘위생용품’이라고 바꿔 말해달라는 남성들이 있는 한 생리대와 생리통, 생리혈, 생리컵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을 수밖에.

8. 여자들과 이야기하는 게 재미있다
한국에서 많은 여성의 삶은 결혼 전과 결혼 후, 무엇보다 출산 전과 출산 후로 크게 변한다. 삶의 중심이 바뀌는 만큼 친구 간에도 각자의 상황에 따라 공감대가 크게 줄기도 하고, 인력을 충분히 배치하지 않는 시스템 때문에 한 직장 내 비혼 여성과 기혼 여성이 각기 다른 형태의 불이익을 감수하며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서로 다른 경험을 하는 여성 간의 이해를 돕고, 무엇이 진짜 싸워야 할 상대인지 명확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나 자신뿐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여성들이 한국에서 살며 맞서며 도전하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서로 응원하는 것 또한 일상의 새로운 즐거움이다.

9. 인지부조화 관찰이 재미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임신보다 낙태를 더 많이 하는 김치년들”이라는 표현, 그리고 너무 저급해서 차마 지면에 실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여성혐오적 욕설을 보았을 때 분노보다 웃음이 먼저 터지게 된 것이. 서양에서는 페미니즘이 아니라 ‘젠더 이퀄리즘’이 대세라는 ‘팩트’가 한 개인의 ‘주장’에 불과했다는 것이 밝혀질 때, 전디협은 이른바 ‘페미나치’이며 블리자드 사에서 이들을 고소할 거라 기대했던 이들의 기대가 허물어질 때, 페미니스트에 대한 적개심을 토로하는 이들이 “없던 여성혐오가 생길 지경”이라는 말로 ‘있던 여성혐오’를 증명할 때, “저도 진정한 페미니즘은 지지합니다만”이라는 말로 여성혐오적인 내용의 글이 시작될 때, 그 현장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다. 악취미이긴 하지만.

10. 내 마음대로 사는 게 재미있다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선택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 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2월 22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제13차 인구포럼: 주요 저출산대책의 성과와 향후 발전 방향’ 보도자료 중 한 대목이다. 문제는 지난해 말 공개된 행정자치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에 이어 이 놀라운 음모 역시 은밀하지 않게 공개되며,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알고 글을 읽을 줄 아는 페미니스트들에게 발각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놀랍겠지만 여성도 선택이라는 걸 할 수 있다. 이성을 만날 수도 안 만날 수도, 결혼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아이를 낳을 수도 안 낳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만으로도 차별주의자들을 분통 터지게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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