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선언│① 페미니스트 선언은 실천이다

2017.02.28

페미니스트의 P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지난 2월 16일 현재 가장 유력한 대선주자인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는 선언과 함께 성평등 공약을 발표했다. 그것이 충분한 수준이냐는 것과는 별개로, 스스로 “나 역시 어머니가 한 사람이고 여성이라는 사실을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고 말한 것처럼 분명 그동안 문재인이 여성 문제에서 보인 어떤 말과 행동보다 진일보한 공약들인 건 사실이다. 평소 문재인을 지지하며 스스로를 정치적 진보로 자처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해선 공격적인 입장이었던 남성 중심 커뮤니티에선,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에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그중 가장 많이 회자된 건 모 커뮤니티의 “메갈(리아) 워마드 때문에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P만 들어도 거부감 생겨서요”라는 글이었다. 유쾌한 페미니스트들은 ‘Peminism Fower’를 외치며 작은 승리를 즐겼다. 하지만 단지 조롱하고 끝내기에 이 작은 철자법 실수는 좀 더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다.


여전히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이들이 있다. 철자법도 모를 만큼. 하지만 잘 안다고 생각한다. 틀린 철자를 아무 위화감 없이 내뱉을 만큼. 그럼에도 그 차이는 그들이 P와 F를 입 밖에 내지 않는 이상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P와 F의 차이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이란 단어의 ‘ㅍ’ 안에 숨어든다. 둘의 차이는 은폐되고, 페미니즘에 대한 무지 역시 은폐된다. 이들에게 페미니즘은 텅 빈 부정의 언어다. 모르지만 안다고 말하기 위해선, 모르지만 부정하기 위해선,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내세우기 위해선, F를 P가 대체하듯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페미니즘을 왜곡해야 한다. 해당 게시물에 댓글로 이퀄리즘이 소환된 건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페미니즘에 반대하면서도 스스로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선 페미니즘을 성차별주의로 몰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페미니즘은 아닌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그것이 이퀄리즘이다. 그리고 이퀄리즘이란 개념이 한 안티 페미니스트의 날조였다는 사실처럼, 페미니즘을 부정하기 위해 동원되는 모든 것들은 다 엉터리다. 페미니스트의 P처럼.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 이 질문은 오히려 많은 것을 원점으로 되돌린다. 페미스트여야 하는가 아닌가, 페미니스트가 아니어도 되는가 아닌가, 이것은 페미니즘을 개인이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하는 문제처럼 다룬다. 이건 가짜 논의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에, 성별 피부색 성적 지향 등 생득적인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여성이라고 돈을 덜 받고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해야 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것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확장된 규칙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하는 그대로 존엄하며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가장 근원적인 한 줌의 도덕이다. 페미니즘마다의 각론과 실천의 방식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우리가 페미니스트여야 한다는 것은 문명인으로서의 전제 조건이다. 민주주의자라면, 진보주의자라면,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바란다면,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바란다면, 깨어있는 시민이라면, 페미니스트여야 한다. 페미니즘 없는 민주주의라는 건 동그란 세모 같은 것이다.


하지만 다시, 페미니즘에 숨은 P는 교묘하게 동그란 세모를 가능하게 만든다. 페미니즘을 더는 부정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문명인으로서 페미니스트임을 선언해야 할 때, P는 마치 그것이 원래 페미니즘인 것처럼 침투한다. 기득권으로서의 남성은 페미니즘을 비난할 땐 세상 모든 공격적이고 과격한 이미지를 다 덧씌우지만, 페미니즘을 받아들일 땐 이것이 실천적으로 투쟁의 문제라는 것을 지우려 한다. 일, 치안, 육아, 가사 등 시스템과 생활세계 모두가 이성애자 남성을 중심으로 설계되고 그것이 인류 보편의 것처럼 이해되는 사회에서 이성애자 남성 아닌 이들의 권리를 찾는 일은 근본적으로 투쟁적일 수밖에 없다. 페미니즘의 투쟁적인 측면이 불거질 때마다 나오는, 남녀 싸우지 말고 친하게 잘 지내요, 따위의 속편한 소리는 정확하게 현재 필요한 F(Fight)를 강요된 P(Peace)로 대체한다. 페미니스트를 선언하지만, 실천적인 페미니즘의 도래를 끝없이 미룬다.


하여 페미니스트 선언은 정적일 수 없다. 나 역시 싸우겠다는 선언이고, 수많은 회의와 반성의 지난한 길을 걷겠다는 다짐이어야 한다. 그 이유로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선언 당일에 벌어진 일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 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에게 한 여성 성소수자는 “왜 이 성평등 정책 안에 동성애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시는 겁니까”라고 기습적으로 질문했다. 문재인은 나중에 말할 기회를 주겠다고 답변을 미뤘고, 그의 지지자들은 “나중에”를 연호했다. 성소수자 인권을 나중으로 미루겠다는 것이 아니라 발언을 나중에 하라는 뜻이었다 해도, 당장 그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고 언제나 발언권이 미뤄졌던 이들에게 나중에 말하라는 건 실천적으로 그들의 인권 문제를 뒤로 미룬 것과 다를 바 없다. 이후 진행된 문답 시간에도 문재인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동성 결혼 법제화와 차별금지법 제정을 미루는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이고 조심스러운 접근이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의 싸움에 함께 하겠노라고 확신시키기에는 부족한 제스처였다. 진보의 연속성 안에서 사회적 합의로 차츰차츰 진행하겠다는 선의는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연속성보다 중요한 건 단절이다. 불의의 연속성을 끊어내는 것, 과거에 당연시 했던 차별과 야만을 이제는 ‘금지’하겠다는 것. 페미니스트 선언이란 그런 것 아닐까. 지금 이 순간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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