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달고, 짜고, 맵고, 쓴 [부엌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2017.03.03


세상에는 베일리스 버터크림 다크 초콜릿 기네스 케이크라는 게 존재한다. 카카오와 기네스를 넣은 촉촉하고 새까만 시트에 베일리스 풍미의 새하얀 버터크림을 층층이 바른 이 거짓말처럼 근사한 아일랜드 케이크는, 사샤 마틴이 자신의 블로그 ‘글로벌 테이블 어드벤처’에서 요리한 195개국 음식들 중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책은 그 케이크와 비슷한 것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샤의 오른손 두 손가락에는 지문이 없다. 엄마가 햄버거를 만들다 잠깐 등을 돌린 사이 그릴을 만졌기 때문이다. 부엌은 어느 집에서나 삶의 공간이지만 문자 그대로 삶의 전부인 부엌도 있다. 치안이 나쁜 동네의 방 하나짜리 집에서 혼자 남매를 키운 엄마의 부엌은 단순히 음식을 만들고 먹는 공간이 아니었다. 옷장이자 침실이고 거실이기도 했다. 엄마가 요리를 대하는 태도는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았다. 단 한 조각도 낭비는 금물인 삶, 긁어모아서 만든 삶이었다. 아이들의 생일에도 남의 과수원에서 주운 무른 사과로 파이를 만드는 게 고작이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애인이 집 판 돈을 들고 사라지자 홧김에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두 살짜리 아이를 데리고 사모아로 떠난 사람이었다. 남다른 삶의 관점을 가진 그녀에게는 팍팍한 일상을 눈부시게 바꾸는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기존 관습을 거부하다 못해 안전벨트까지 못 매게 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학교에서도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켰고 남매는 위탁가정을 전전한 끝에 결국 남에게 맡겨졌다.

부엌이 전부인 삶은 끝났다. 그들은 미국, 프랑스, 룩셈부르크에서 살았고 노르웨이, 튀니지, 그리스, 스페인 등 9개국을 여행했다. 하지만 사샤는 부유할 뿐 아니라 상냥하기도 한 그들을 받아들이는 대신 엄마에게 집착했고, 그것은 요리에 대한 갈망으로 나타났다. 엄마가 가르친 무언의 교육에 따르면 요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우여곡절의 해결책이었다. 권태를 해소하는 해독제였고 암울한 현실을 떨치는 방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샤에게 요리를 시키지 않았다. 손바닥만 한 엄마의 아파트에서는 침대에서 스토브까지 반 발짝이면 되었는데 이 집은 부엌이 너무 멀었다.

음식에 대한 집착은 종종 삶에 대한 허기로 설명된다. 바게트와 미트소스와 자허토르테가 이토록 황홀하게 묘사되는 것에는, 그렇지만 무해하고 중립적으로 읽히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어린 시절 결핍의 가장 끔찍한 점은 미래에 발목을 잡는다는 것이다. 사샤는 엄마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요리를 버린다. 부엌을 더 이상 도피처이자 현혹물로 이용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후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감을 느끼지만 평화는 없다. 언젠가는 깨질 거라는 공포를 떨치지 못한다. 그러다 문득 지금껏 가본 나라들과 자신을 먹여 살린 음식들이 생각났고,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의 아직 먹어보지 못한 이국적인 음식들을 요리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부엌에 다시 섰고,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 삶은 완벽하지 않다. 기쁨뿐 아니라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하며, 최선의 길을 선택해도 늘 최선의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사랑은 때로는 설탕보다 달지만 가끔은 짜고, 맵고, 쓰다. 인생도 그렇다.
 
*정은지 씨의 '그와 그녀의 책장'은 [부엌은 내게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를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정은지
책과 음식과 쇼핑에 관한 글을 써서 번 돈으로 책과 음식을 쇼핑한다. 책 속 음식에 관한 이야기인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썼고, [아폴로의 천사들]·[피의 책]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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