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그녀의 책장

[빈 서판], 현실주의적 진보주의의 세상

2017.03.10
‘인간 본성’이라는 말은 특히 진보주의자에게 인기가 없다. 우리가 무언가를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는 이 말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인종주의, 우생학, 성차별, 아우슈비츠, 유전자 결정론, 가난 혐오, 파시즘, 기타 상상 가능한 온갖 무시무시하고 사악한 태도를 떠올린다. 1978년 하버드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공개연설 중에 “인종주의자 꺼져라!”라는 구호와 함께 주전자 물벼락을 맞았다. 윌슨은 분명히 인종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사회생물학을 창시하고 인간의 본성을 강조했다는 이유로 거의 파시스트 취급을 당했다.

이 주제로 스티븐 핑커의 앞에 설 변호사는 없다. 언어학자이자 인지심리학자이자 진화심리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이며, 그 모든 영역에서 초일류인 이 수퍼스타는 2002년작 [빈 서판]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그가 말하는 ‘빈 서판’이란 우리가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우는 ‘백지설’이다. 인간은 선하든 악하든 본성을 타고 나지 않았으며 노력에 따라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다는 신념체계다. 인간의 운명이 온전히 후천적인 요소에 달려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진보주의자에 어울려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책의 전반부에서 핑커는 유전학과 인지과학을 넘나들며 인간 본성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쏟아낸다. 우리는 백지 상태로 태어나지 않았다. 생존과 번식을 도와주기 때문에 진화의 거름막을 통과한 전략, 그러니까 본성이 탑재된 채로 태어난다. 정치적으로 불편하든 말든, 선천적으로 더 매력 있는 얼굴과 선천적으로 더 우수한 지능도 존재한다! 하지만 압권은 후반부다. 핑커는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진보주의자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으며, 오히려 빈 서판의 옹호자들이 인간에 대한 치명적 오해 때문에 재앙을 초래했다고 역설한다.

만약 우리에게 본성이 없고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나 부처인 세상도 꿈꿔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선하고 이타적이라는 전제로 사회 제도를 고안하는 것은 현실에 지옥을 만들어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우리가 더 나아지길 원하는 진보주의자야말로 인간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 현실에서 출발하는 사람만이 현실을 바꿔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의 순서, 그러니까 당위와 이상을 먼저 설정하고 현실더러 거기로 옮겨 가라고 그저 닦달하는 태도는 진보는커녕 대체로 세상을 후퇴시킨다. 이런 이들이 진보주의자를 참칭하게 두어서는 곤란하다.

핑커를 읽으면 ‘현실주의적 진보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어떤 지적 전통을 느끼게 된다. 후손들이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18세기 미국 헌법 입안자들은 이 신생 공화국이 “자유를 보장한다”라고 그저 선언하지만은 않았다. 대신 이들은 탐욕과 시기심과 지배욕과 파벌을 만드는 인간 본성을 정면으로 마주보며, 제도를 어떻게 설계해야 인간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지 집요하게 물었다. 이 탁월한 질문이 18세기 인류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진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인간 본성을 직시하고 거기서 출발해야만 진보가 가능하다는 이 선배들의 지적 전통을, 핑커는 현대과학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더할 나위 없이 계승해 냈다.
 
*천관율 기자의 '그와 그녀의 책장'은 [빈 서판]을 마지막으로 연재가 종료됩니다.
 
천관율
[시사IN] 기자. 6년 동안 정치 기사를, 14개월 동안 사회 기사를 썼다. 2016년 1월부터 경제와 국제를 취재한다. 쟤도 뭐 하나는 사람답게 하는 게 있겠거니 기대를 버리지 않는 조직에 점점 더 미안한 마음이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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