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의 세포들]│① [유미의 세포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일 수 있다

2017.03.28
“남자 주인공은 따로 없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명이거든.” 네이버웹툰 [유미의 세포들] 194화 ‘남자 주인공’ 편에서 주인공 유미의 마음속 소망과 목표를 관리하는 게시판 세포는 남자친구인 구웅에 대해 “내 인생의 남자 주인공 같은 그런 사람”이라는 유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전 남자친구와 같은 이름을 지닌 회사의 우기에게 설렜다가 실망하고 그가 소개시켜준 구웅을 만나 사랑을 느끼고 연애를 시작하는 과정을 그린 시즌 1의 엔딩을 생각하면, 현재 [유미의 세포들]은 전 시즌과 다른 작품이 된 듯하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지금의 유미는 과거의 그 유미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유럽 카툰 스타일에서 꾸준히 변화된 그림체 때문만은 아니다. 시즌 1 막바지에 본심 세포와 자신감 세포가 결합한 프라임세포의 등장으로 더 솔직하고 더 자신감 있는 인간이 됐던 유미는 시즌 2에선 웅이와의 갈등 중에 자기 인생의 우선순위를 웅이에서 본인으로 바꾼다. 그렇다면 그 변화를 이끈 것은 누구인가. 사랑 세포? 신의 한 수(본심 세포+자신감 세포)? 게시판 세포? 다 맞고 또 다 틀렸다.

위에서 인용한 게시판 세포의 말은 그 감동적인 포인트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 맥락에선 일종의 자기모순에 가깝다. 이 이야기([유미의 세포들])의 주인공은 타이틀 그대로 세포‘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한 이 세포들은 유미 자신이다. 다시 말해 유미의 변화를 이끈 건 유미 자신이다. [유미의 세포들]의 탁월한 점은 그 과정을 의인화된 세포들로 재밌게 풀어냈다는 것이 아니다. 선후가 바뀌었다. 이토록 다양한 복수형의 주인공‘들’을 통해서만 한 인간이 자기 삶이란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것에 이 작품의 통찰력이 있다. “머릿속에 그렇게 다양한 군상이 북적거리는데 (중략) 그 주인이 얄팍한 캐릭터가 될 수가 없다”는 미디어 평론가 김낙호의 설명은 정확하다. 덧붙이자면, 그 북적거림은 단순히 세포들 의견의 총합이 아닌 새로운 목소리를 만들어낸다. 세상을 고정된 시선으로 바라보고 판단하는 독백적인 자아는 결국 새로운 말을 발견해낼 수 없다. 하지만 자기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들이 부딪히는 대화적인 자아는 그 충돌 안에서 새로운 말과 시선을 발견해낸다. 유미처럼.

아예 제목부터 ‘의견 충돌’이었던 에피소드에서 신의 한 수 세포는 여행에 심드렁한 웅이에 대해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 말하는 사랑 세포에게 “유미의 세포이면서 꼭 웅이의 세포처럼 말을 하네?”라고 말한다. 사랑과 자존심 중 무엇이 중요한가의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많은 경우의 수가 있다 해도 여러 세포의 의견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는 새로운 경우의 수를 만들 수 없다. 보기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복잡하게 변형된 독백일 뿐이다. 중요한 건 여러 세포가 대화하며 나오는 새로운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답하는 것이다. 해당 에피소드에서 참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상대의 기분 때문에 유미의 기분을 포기하는 게 온당한가, 라는 질문으로 변환된다. 이것은 유미를 위해 사는 세포들에겐 피할 수 없는 윤리적 질문이다. 유미가 웅이에게 “효율을 따질 거면 여행 자체를 가지 말아야지”라고 말한 건, 사랑 세포가 신의 한 수에게 진 게 아니라 사랑 세포도 동의할 수밖에 없는 자기배려의 윤리를 새롭게 발견한 것에 가깝다. 시즌 초반, 신경을 긁는 루비에게 히스테리우스의 지배를 받아 까칠하게 대했을 때와 최근 회차에서 깐족대는 남사원 한별 대리에게 여유 있게 한 방 먹이는 것 사이엔 이러한 변곡점이 존재한다. 그리고 유미가 더 나은 사람이 될수록 [유미의 세포들]의 서사 역시 필연적으로 더 윤리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전작 [달콤한 인생] 연재 당시 여성 작가일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이동건 작가의 작품답게 [유미의 세포들]은 초반부터 여성의 심리를 잘 그려낸다는 반응을 얻는 편이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요소들이 없진 않았다. 루비는 어리고 개념 없는 여자애라는 전형성에 갇혀 있었고, 그의 성격을 설명하는 에피소드에서조차 그의 프라임 세포에는 ‘여’배우 세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작가 스스로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프레임이 아닌 세대 간의 문제로 그리고 싶다고 했지만, 웅이의 여자 사람 친구인 서새이와 유미의 갈등에서 비슷한 구도가 만들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씩 유미의 세포들이 늘어나고 더 소란스러워지고 유미가 더 주체적인 인간이 될수록, 인물의 관계를 풀어내는 방식도 훨씬 세련되어진다. 처음엔 웅이를 쥐락펴락하는 새이의 얄미움이 강조됐다면, 이후엔 사귀는 사람이 있음에도 제대로 맺고 끊지 못하는 웅이의 우유부단함이 문제의 핵심으로 부각된다. 없던 웅이의 단점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원래 있었지만 남성 중심적인 시선에선 사소한 것으로 치부됐던 요소가 본질을 드러낸 것이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주인공의 시야가 확장되는데, 작가가 외면할 수는 없는 법이다. [유미의 세포들]을 여성주의적인 작품이라고까지 하긴 어려울지 몰라도, 여자 주인공의 내면을 열심히 탐구하던 남성 작가가 캐릭터와 함께 성장하며 본인 역시 더 넓고 올바른 시야를 가지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미의 세포들]은 연애 만화이자 개그 만화지만, 궁극적으로는 성장 만화다. 이것은 치기로 세상과 부딪혀가는 청춘물의 성장과도, 더 강한 적을 만날 때마다 더 강해지는 소위 소년만화의 성장과도 다르다. 해당 장르의 성장이 도전과 응전의 메커니즘이라면, [유미의 세포들]은 우리 안의 성찰적인 힘이 어떻게 우리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다. 또한 작품 바깥에서 “이성애자 남성으로서 여자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며 주인공 내면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작가가 필연적으로 더 섬세해진 젠더 감수성을 서사 안에 풀어내는 것 역시 우리 안에 잠재된 성장의 가능성을 증명해낸다. 청춘이 아니더라도, 굉장한 영웅적 기질이 없더라도, 평범한 우리 역시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고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유미의 세포들]이 작품 안과 바깥에서 증명하는 사실이다. 이것이 희망의 증거가 아니라면 무엇이 희망의 증거이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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