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너의 이야기가 나의 고통이다

2017.04.13
82년생 김지영 씨는 알았을까. 그가 살아온 삶의 궤적에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공감하리라는 것을. 그가 겪는 일이 김지영이어서가 아니라 여자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면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모습으로 살 수 있었을까.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개연성이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에는 만들어낸 개연성이 필요하지 않다. 김지영 씨의 사소한 말 한마디부터 중대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그 앞에 놓였을 선택지와 기대되는 역할, 암묵적인 압박 모두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소설은 보편적인 ‘여성으로서의 삶’의 핵심을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완벽한 개연성을 획득하였다.

김지영 씨가 태어난 80~90년대는 여아 낙태 비율이 최고조에 달하던 때이다. 딸-딸-아들의 구성에서 둘째와 셋째 간의 나이 차가 꽤 나는 경우를 볼 때마다 그 사이에 있었을 여아를 생각한다. 태아가 여자라 낙태를 해야 하는 여자, 별생각 없이 혹은 일부러 낙태에 관심 두지 않는 남자를 생각한다. 김지영 씨의 아빠는 셋째가 딸일 가능성을 염려하는 엄마에게 재수 없는 소리 말라며 돌아누우면 그만이다. 남자는 자식 성별에 따른 부담뿐만 아니라 낙태에 대한 윤리적 책임에서도 자유롭다. 여아 낙태를 종용하는 사회 분위기에 노골적으로 동참하지 않지만 저항하지도 않음으로써 물리적, 정신적 고통은 모두 여자의 몫이 된다.

둘째 딸로 태어난 김지영 씨의 성장 과정은 태아일 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위협적인 상황에 처하고, 안전과 주체성 여부는 단지 운에 달려 있다. 가정, 학교, 일터에서 명시적인 성차별은 사라진 대신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132쪽)은 더욱 은근해지고 교묘해졌다. 남동생과 달리 ‘자발적으로’ 집안일을 하고, 선배와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업무 능력이 처지는 남자 동기보다 열등한 대우를 받으며 김지영 씨는 자꾸만 입을 다문다. 문제 제기 후 변화는 없고, 오히려 문제를 유발했다는 책망을 들으며 침묵은 김지영 씨의 생존전략이 되어간다.

결혼은 이러한 차별 기제를 좀 더 적나라하게 맞닥뜨리는 경험이다. 상견례에서부터 김지영 씨는 집안일을 잘할 거라는 격려를 듣는다. 불공평한 가사 분담은 고정된 성역할에서 기인하지만, 여자의 낮은 경제력이나 사회화된 꼼꼼함으로 정당화되기 마련이다. 가사와 육아가 분담되지 않은 상태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에서의 이중 노동을 의미한다. 모두들 모성애를 찬양하지만, 여자는 임신 가능성만으로 노동시장에서 평가절하되고,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여자의 몸에 벌어지는 일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는 부족하다. 김지영 씨를 대변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시점이 결혼 후 시가 노동과 육아 중인 것은 현시대의 결혼과 출산이 여자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부분이다.

이쯤 되면 김지영 씨의 고통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92년생 김지훈’도 힘들다는 반응이 나온다. ‘남편 돈으로 커피 마시는 맘충’ 소리를 들은 김지영 씨의 상황을 미러링한다며 스타벅스에서 군인이 ‘고기방패’ 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러나 ‘92년생 김지훈’은 실재하지 않는 위협이다. 오히려 옆자리 ‘스벅녀’가 본인을 고기방패처럼 쳐다보았다며 ‘김치녀’라 욕하는 것이 더 현실적일 것이다. 무엇보다 가부장제하에서 남성에게 주어지는 부담이나 의무가 있다면, 그것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자 그로 인한 반작용일 뿐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소설에서 제시하는 길은 연대다. 김지영 씨의 고통을 대변하는 것은 엄마와 선배의 목소리다. 남학생의 괴롭힘에 대한 누명을 벗겨준 여성, 회사에 몰카가 설치되어 있음을 알린 여성, 버스에서 위협적인 남성을 제지해준 여성은 서로가 서로의 용기가 되어준다. 김지영 씨는 나이고, 내 친구이고, 강남역에 있던 그이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에서 여성들은 운이 좋아 살아남았고, 명확히 깨달았다. ‘나는 너다.’ 그러니 서로를 위해 함께 외쳐야 한다. 김지영 씨의 삶이 여성으로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과 성격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날이 올 때까지.

사월날씨
결혼생활을 좋아하지만 결혼제도는 고통스러운 결혼 3년차.
결혼제도의 불평등과 불합리를 고발하는 책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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