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널리티

권해효의 삶

2017.06.07
영화 ‘그 후’ 포스터 속 권해효의 모습은 평범하면서도 인상적이다. 식탁 위에는 일회용 용기에 담긴 김을 포함해 조촐한 밥상이 차려져 있고, 집 안인 듯 편안한 차림의 권해효는 식탁 너머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고 있다. 지난달 칸 국제영화제 홈페이지를 통해 ‘그 후’ 포스터가 공개됐을 당시, 국내 SNS상에서는 감독이나 스토리보다 오히려 이 모습 자체에 관심이 집중됐다. 피로가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 꾹 다물고 있지만 부루퉁하게 삐져나온 입술, 그리고 흑백사진으로도 숨길 수 없는 희끗한 머리카락 같은 것들. 정지된 사진 속의 모든 요소들은 연기이자, 권해효 그 자체처럼 보였다.

1990년 연극 ‘사천의 착한 여자’로 데뷔한 권해효는 드라마, 연극, 영화 등 다양한 작품에서 주로 단역 및 조연을 맡아왔다. 올해로 데뷔 27년 차를 맞이한 그가 출연한 드라마와 영화만 해도 100편이 훌쩍 넘을 정도다. 공백 없이 꾸준히 연기 생활을 이어왔지만 대부분 조연이었기에 큰 반응을 얻었던 적은 드물었다. 1996년 MBC ‘남자 셋 여자 셋’에서는 카페 주인으로 등장했으며, KBS ‘겨울연가’에서는 이민형(배용준)의 친구로 출연했다. 2005년 MBC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보여준 김이영(이아현)과의 러브라인처럼 뜻밖에 화제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은 작품이 끝남과 동시에 잊혀졌다. 데뷔 초 ‘한국의 짐 캐리’라고 불렸을 만큼 독특한 외모를 가졌고 이와 어울리는 코믹한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대부분의 작품에서 권해효가 보여준 것은 평범한 생활연기였다. 이는 그가 나이 들어감에 따라 들어오는 배역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드라마 출연작인 MBC ‘자체발광 오피스’에서는 팀장을, SBS ‘질투의 화신’과 ‘딴따라’에서는 각각 보도국장과 예능국장을 연기했던 것처럼 말이다. 캐릭터로 기억되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평생 직업으로서 착실하게 연기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배우가 있다. 굳이 따지자면, 권해효는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그가 단지 성실한 조연일 뿐이었다면, 지금처럼 대중들에게 각인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연예인이자 사회활동가로서 권해효의 인상은 누구보다 강렬했다. 1996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1일 감옥체험’에 참여했던 것을 시작으로 권해효는 호주제 폐지, 여성가족부 폐지 반대, 반값등록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시위 활동에 꾸준히 참가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반대 집회, 세월호 참사 농성을 비롯한 각종 사회 행사에 진행자나 홍보대사, 후원자로서 힘을 보태왔다. 이러한 사회 참여에 대해 권해효는 “대학 시절 집안 사정 때문에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한겨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연예인의 존재는 희귀한 것이었고, 때문에 대중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권해효에게 사회활동은 연기와 마찬가지로 삶의 일부였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을 찾아냈다. ‘겨울연가’가 한류열풍을 일으키며 일본에 자주 방문하던 무렵 재일동포들을 통해 조선학교 문제를 알게 됐고, 현재 권해효는 조선학교 불평등 문제에 앞장서는 ‘몽당연필’의 대표를 맡고 있다. 또한 그가 여성문제와 양성평등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당함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권해효는 연기와 상관없는 삶도 충실히 살아갔고, 그것은 그가 맡은 배역에 자연스러운 일상성을 부여했다. 평범한 조연 캐릭터를 연기하더라도 보는 사람에게 현실적인 일상을 느끼게 만드는 배우. 그 결과 그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많은 배역을, 더 자연스럽게 연기하게 됐다.

그리고 50세가 넘어서야 만난 실질적인 첫 주연작에서, 그는 불륜을 제외하면 평범한 출판사 사장을 연기했다.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참 일상적인 역할이었다. 하지만 이 작품으로 권해효는 아내와 함께 칸 영화제의 레드카펫을 밟았고, 기립박수에 눈시울을 붉혔으며,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멋지게 파리 여행을 즐기고 귀국했다. 특별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으로서 살아온 사람이 맞이한 최고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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