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액션만 남아 슬픈 여자

2017.06.14
지난 주 개봉한 ‘악녀’의 정병길 감독은 제작발표회에서 “‘한국에서 그게 되겠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런 약간의 우려가 오히려 제게 더 큰 자극을 줬다. ‘여자 원톱 영화가 안 된다’는 말은 곧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말로 들렸다”고 말했다. 여주인공 단독으로 끌고 나가는 액션영화의 상업성에 대한 우려를 반영한 말이었다. 주인공 숙희를 연기한 김옥빈 역시 “여배우에게도 기회만 있다면 이렇게 잘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은 것 같다. 이런 움직임들을 통해서 여성원톱물을 향한 편견도 깨졌으면 좋겠다”(‘스포츠 한국’)고 말했다. '악녀'의 첫 시퀀스는 이런 자신감의 근거처럼 보였다. 숙희가 좁은 복도에서 튀어나오는 적들을 1인칭 슈팅 게임 시점으로 모두 죽여버리는 것은 물론, 총, 장총, 칼, 쌍칼, 밧줄, 도끼 등 보여줄 수 있는 무기를 다 써서 힘 있게 액션을 한다. 숙희는 몸의 근육을 남성과 똑같이 활용해 가장 빠르게 죽일 수 있는 부위를 가차 없이 공격한다. 여성이 힘 있고, 강하고, 정확하며,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는 것은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순간이다.

그러나 이 시각적으로 화려한 액션은 정작 숙희를 묘사하는 방식과 부딪힌다. 정병길 감독은 “초등학생 시절부터 ‘니키타’ 같은 뤽 베송 영화를 좋아했다. (중략) 어린 마음에도 ‘사람 마음을 이렇게 갖고 노나?’하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씨네21’)고 말했다. ‘니키타'는 뒷골목에서 자란 여성 니키타(안 파리오)가 사람을 죽인 뒤, 정보기관에서 전문 킬러로 양성 돼 임무를 수행하며 느끼는 좌절과 고통에 초점을 맞췄다. 제도권 밖에서 살아온 숙희가 ‘정상’으로 생각하는 삶을 바라며 아이를 갖고, 아이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살인을 해야 하는 상황과 유사하다. 그러나 ‘니키타’의 핵심은 야생마 같던 니키타가 정보기관의 통제 아래 ‘여성’ 정보원으로 거듭나면서 혼란을 느낀다는데 있다. 니키타에게 화장을 가르친 정보원은 “여성은 두 가지 영원한 특권 있다. 여성다움, 그리고 그 여성다움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니키타는 그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반면 ‘악녀’에서 숙희는 어떤 것도 선택할 여지가 없다. 결혼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이는 자신을 킬러로 기른 중상(신하균)이 숙희의 동기 부여를 위해 했던 가짜결혼이었다. 국정원에 들어간 이후 요원의 삶을 살면서 했던 두 번째 결혼도 마찬가지다. 숙희는 살인기계와 같은 삶을 살면서, 그의 선택은 언제나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자신의 의사가 담긴 선택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숙희가 느끼는 고통은 현실의 여성을 전혀 담지 못한다. 숙희는 사랑하는 남자가 죽고 난 다음 생긴 아이를 낳는 것에 대해 고민 없이 받아들이고, 당사자가 출산과 육아에 대해 느끼는 부분은 삭제된다. 결국 모성애는 아이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다는 식의, 복수를 위한 도구에 그친다. ‘악녀’는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들의 액션을 보여주지만, 정작 극단적인 상황에 이른 여성에 대한 궁금증이나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국정원에서 숙희가 훈련을 받을 때도 또다른 여성요원 김선(조은지)은 이유 없이 민주(손민지)를 괴롭히고, 민주를 구해준 숙희를 싫어한다. 김선이 왜 그런 사람인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고, 반대로 민주는 임무 중 숙희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려 칼을 막고 죽는다. 민주가 그저 숙희의 아픔을 증폭시키기 위해 소모되는 것은 그 동안 많은 영화에서 여성을 소모적으로 써온 방식이기도 하다. 또한 현수(성준)는 숙희를 CCTV를 통해 관찰하다 숙희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정보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진다. 여성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생활이 공개되는 한국에서 숙희를 몰래 볼 뿐 전혀 소통하지 않은 현수의 감정이 진실된 사랑처럼 묘사된다. ‘악녀’에는 계속 여성이 나오지만, 여성의 액션 외에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악녀’의 액션이 보여주기에 집중하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숙희가 아버지의 피를 보는 모습부터 원피스를 입은 다리 사이로 피가 쏟아지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총을 쏘는 장면 등, ‘악녀’는 숙희를 통해 계속 액션을 보여준다. ‘니키타’ 뿐만아니라 ‘킬빌’, ‘캐리’, ‘암살’ 등 많은 영화를 가져온 이 장면들은 그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악녀’는 액션 사이에 보여줘야할 여성의 이야기가 사라져 있다. ‘악녀’는 여자가 남자들을 다 죽인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액션에 국한되는 것이고, 인간이자 여성으로서 숙희의 이야기는 여전히 여성에 대한 전형적인 이미지를 소비하는데 머물러 있다. 그래서 ‘악녀’의 숙희는 안타깝고 슬픈 존재다. 액션이라는 외로운 몸만 남은 숙희는, 한국 영화가 가야할 길이 아직 멀고 험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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