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릴 미’ 피아니스트 오성민, 이범재 “예민한 감정들을 캐치해야 하니까 유연하게 연주한다”

2017.06.16
매해 불황이라는 한국 공연시장에서도 열렬한 마니아층을 형성하며 10년 동안 살아남은 뮤지컬 작품이 있다. 바로 ‘쓰릴 미(Thrill Me)’다. 1924년에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아동 살인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진 이 뮤지컬은 ‘나(네이슨)’와 ‘그(리처드)’라는 두 명의 천재 소년과 피아니스트 단 한 명만이 무대에 오른다. 서로를 의지하기도 하고 내치기도 하는 소년들 사이의 미묘하고 불안한 심리전은 피아니스트의 손끝을 타고 한층 섬뜩하게 다가온다. 한국 공연 10주년을 맞아,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른 ‘쓰릴 미’의 베테랑 피아니스트 오성민과 신입 피아니스트 이범재를 함께 만났다. 그동안 ‘쓰릴 미’의 피아니스트들은 어떻게 배우들의 감정을 읽어내고, 표현했는가.


오성민 피아니스트는 ‘쓰릴 미’ 10주년 마지막 공연을 끝내고 나서 개인 SNS에 “백수 됐다”고 썼다.
오성민
: 오랜만에 쉬었다. 지금은 첫 솔로 앨범을 준비하고 있고, 아마 7월에 나올 것 같다.
이범재: 나는 백수가 아니다. (웃음) ‘라흐마니노프’ 재연에 참여하고 바로 이어서 ‘쓰릴 미’에 들어갔다. 지금은 ‘투모로우 모닝’ 음악감독이다. 사실 ‘쓰릴 미’는 피아니스트와 배우가 함께 가는 극이 드물어서 해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성민 씨와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선택한 작품이었다.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쓰릴 미’는 아주 고요한 분위기에서 배우 두 사람과 피아니스트 한 명, 이렇게 셋이서 끌고 나가는 뮤지컬이라 배우들과도 굉장히 가까울 것 같다. 제작사 쪽에서 올린 ‘쓰릴 미 TV’에서는 배우 정욱진이 이범재 피아니스트에게 “정말 웃기는 범재들이었습니다”라면서 엉뚱한 내용의 농담을 던지던데.
이범재
: 그러게, 욱진 씨가 왜 그랬을까? (웃음) 사실 ‘쓰릴 미’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이 다 마찬가지다. 이 일은 언제나 낯선 사람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한다. 그때마다 특별히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건 아니고, 계속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성민 씨 같은 경우에는 ‘쓰릴 미’가 워낙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분들이니까 진짜 편해 보였다. 다행히 나도 낯을 안 가려서 괜찮았지만.

오성민 피아니스트는 이미 여러 차례 ‘쓰릴 미’에 참여했다. 반대로 이범재 피아니스트는 처음이고.
오성민
: 사실 나는 10년 동안 다섯 시즌에 참여했고, 그러다 보니 정답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있다. 물론 정답 아닌 정답이지만. 예를 들어 ‘아, 저 사람이 지금 저렇게 숨 쉬었으면 노래는 안 하겠구나’ 이런 건 금세 눈치채고 거기에 맞출 수 있다. 하지만 범재 씨의 연주를 들으며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싶어 놀라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이범재: 그런데 저 부분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난다. 성민 씨는 배우들의 호흡을 알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갈 수 있는데, 나는 완전히 초보였다. 게다가 ‘쓰릴 미’는 무려 일곱 페어와 합을 맞춰야 하니까 모든 게 다 새로웠다. 오늘 만난 페어와 공연하면서 ‘아, 이제 좀 알 것 같다’ 하면 다음 날은 또 다른 페어와 해야 한다. 그게 제일 어려운 점이었다.

10년 전에 ‘쓰릴 미’가 첫선을 보였을 당시만 해도 동성애, 살인 같은 소재가 한국 관객에게 받아들여질지 의문이었다.
오성민
: ‘쓰릴 미’는 극 짜임새와 음악이 워낙 좋다. 하지만 처음에는 나도 소위 ‘문화충격’이라는 걸 받았다. 어느 정도는 동성애에 반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고, 남자끼리 키스하는 장면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다가 배우분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어떤 장면을 굉장히 몰입해서 보는데 ‘아, 진짜 저기서 저 두 사람이 사랑을 하고 있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순간 동성애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깨졌다.
이범재: 성민 씨가 했을 때는 ‘쓰릴 미’ 초반 시즌이었고, 나는 워낙 검증된 상태에서 작품을 봤기 때문에 소재 때문에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둡고 우울한 감정들이 극 전반에 깔려 있다 보니 감정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두 배우가 부딪치고, 싸우고, 욕하는 장면들이 워낙 많으니까. 계속 같은 모습을 보다 보니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슬슬 우울해지더라. 밝은 분위기를 선호하는 편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10주년 기념 공연이라 강필석, 최재웅, 김무열 같은 초연 배우들도 참여했다. 그런데 사실 주인공들은 20대 초반의 청년들이라서 배우들도 조금씩 부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오성민
: 연습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런스루를 도는 분들이다. 그런데 다들 나이를 먹다 보니 “아빠가”, “삐뽀삐뽀” 이런 귀여운 단어들이 마음에 좀 걸리는 거다. (웃음) 내가 본 페어들 중 가장 오래된 페어는 최재웅-김무열 페어였다. 사실 좀 놀랐다. 워낙 익숙한 작품이니까 이번에는 하고 싶은 설정도 다 넣고, 애드리브도 많이 시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리허설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자”를 외치면서 정석에 가까운 연기를 했다. 반대로 가장 최근에 무대에 올랐던 배우들이 좀 더 특별한 시도를 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는 정욱진-정동화 페어가 가장 신선했다. 특히 정동화 배우가 ‘그(리처드)’ 역할 하는 모습을 이번에 처음 봤는데, 너무 잘 어울려서 놀랐다. 완전히 날것의 청소년 느낌이었다. 김재범 배우도 이번 시즌 해석이 예전과 좀 달라졌는데, 신선했다.

배우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극 중 캐릭터들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10주년 ‘쓰릴 미’는 무려 일곱 페어가 무대에 올랐다. 피아니스트들이 연구하느라 바빴겠다.
오성민
: ‘쓰릴 미’에서는 피아니스트를 ‘제3의 배우’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피아니스트가 배우들을 서브하는 입장에 있다고 본다. 내가 직접 해석해야 하는 넘버는 ‘프렐류드(Prelude)’뿐이고, 나머지 부분은 배우들이 감정을 쌓거나 빼는 대로 따라가는 거다. 물론 이제는 그들이 어떻게 연기하고 노래할지 대강 예상할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 사이에 조금씩 신선한 해석이 들어오기도 하니까 그때마다 배우들의 호흡에 맞춰 연주한다.
이범재: 나는 개인적으로 피아노가 서브를 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작품은 어쨌든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거니까. 배우들의 호흡에 맞추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거기서도 내가 끌고 나가는 스타일이다. 이게 성민 씨와 나의 차이점인데, 팬분들이 안 좋아하실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일단 그날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오는 느낌이 있다. 보통은 그걸 따라간다. 하지만 어쨌든 실제 공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피아니스트가 맞춰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쓰릴 미’를 하면서 힘든 점이 있었을 것 같다. 예전에 한 인터뷰를 보니 이범재 피아니스트는 건반 미스 터치를 걱정하는 듯했다.
이범재
: 원래는 미스 터치 걱정이 없었는데, ‘라흐마니노프’ 마지막 공연쯤부터 갑자기 손에 땀이 많이 나기 시작했다. 연주용 그랜드 피아노는 액션이 좀 무거워서 괜찮은데, ‘쓰릴 미’에서 쓰는 피아노는 가정용에 가까운 업라이트 피아노다. 업라이트는 가벼워서 조금만 엇나가도 소리가 틀려버리기 때문에 걱정이 좀 됐다.
오성민: 이번 공연에서 친 피아노가 유난히 가벼웠다. 손이 스치기만 해도 소리가 나서 역대 시즌 중에 가장 조심조심 쳤다. 또 ‘쓰릴 미’는 피아노 한 대가 모든 넘버를 소화하다 보니 공연 당일 배우 컨디션에 따라서 연주가 너무 많이 좌지우지된다. 그런 상황이 좀 힘들다. 현악기 같은 경우에는 배우에게 맞추려고 악기 소리를 밀면서 이리저리 연주를 해나갈 수 있는데, 피아노는 실질적으로 타악기나 마찬가지라 한 번 소리를 내버리면 끝이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배우분들의 감정 표현이 들어왔을 때, 순간적으로 거기 말리면 끝도 없이 말린다. 이런 부분이 피아노라는 악기를 쓰는 사람 입장에서 약점일 수는 있는데, 반대로 잘 넘어가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난다는 게 좋다.

오성민 피아니스트는 과거에 한 배우가 큰 실수를 했을 때 유연하게 대처해서 ‘오마리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따로 별명도 붙일 만큼 ‘쓰릴 미’ 관객들이 피아니스트에게 관심이 많다.
오성민
: ‘오마리아’는 내가 안 좋아할 수가 없는 별명이다. 잘했을 때 지어주신 별명이라 자부심을 갖고 있기도 하고, 특색도 있다. 제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팬분들도 ‘오마리아’라고 하면 아신다. 피아니스트 활동명도 ‘마리아’로 할까 생각 중이다.
이범재: 관객분들이 피아니스트에게 정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다. 이번에 ‘쓰릴 미’ 하면서 욕도 무척 많이 먹었다. (웃음) 처음에는 이런 반응을 보고 당황했는데, 지금은 괜찮다. 나에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모니터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다.

피아니스트들도 배우들처럼 연기적인 요소를 고려하나.
오성민
: 피아니스트가 연기적인 부분을 연출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인위적으로 자세를 만든다기보다는 작품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울고 있을 때 악보를 넘기거나 할 순 없으니까. 예전에 피아노가 1층에 있을 때는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피아노가 놓여 있었는데, 내가 손을 뻗으면 관객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악보 넘기는 소리도 너무 크게 들렸고, 몸 움직이는 것, 팔 꿈틀거리는 것까지도 보여서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관객분들이 “오성민 어느 장면에서 허리 아픈 것 같더라” 하는 반응까지 보게 되니까. (웃음) 피아노가 2층으로 올라오면서부터는 무대를 내려다봐야 해서 좀 힘들긴 하다.
이범재: 키가 커서 작은 움직임도 남들 눈에 굉장히 잘 띈다. 그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늘 조심하려고 노력한다. 무대를 내려다보려고 고개를 돌리는 행동도 최대한 안 하려 애썼다. 대신에 피아노에 비치는 배우들 모습을 보고 거기에 맞췄다.

페어마다 큐 사인이 다른가.
이범재
: 장면마다 지정된 큐가 있긴 한데, 거기서 작은 부분들이 변한다. 그건 페어별로 바뀌는 게 아니라 회차별로 바뀐다고 말해야 정확할 것 같다.
오성민: ‘쓰릴 미’는 순간순간 감정에 충실해야 하는 극이고, 너무 짜놓은 대로 하면 제대로 연기할 수도 없는 대본이다. 그리고 그렇게 가야 훨씬 자연스럽고 재미있다. 매일 같은 감정으로 연기할 수는 없지 않나. 사랑을 할 때 매일매일 그 감정과 방식이 달라지는 것과 똑같다. 예를 들어 ‘계약서’ 장면에서 ‘나(네이슨)’가 “근데 나, 할 얘기 있어”라는 대사를 치고 피아노 연주가 들어간다. 그런데 그 순간에 네이슨이 정말로 어떤 얘기가 하고 싶어서 리처드 방에 들어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막상 와서 같이 자자고 했는데 거절당하니까 무슨 말이라도 걸고 싶어서 얘기를 꺼낸 걸 수도 있다. 그런 예민한 감정들을 캐치해야 하니까 되도록 유연하게 장면을 끊어가면서 연주하는 거다.

각자 자신의 연주 스타일과 가장 잘 맞는다고 느꼈던 페어가 있었을 것 같다.
이범재
: 김재범-정상윤 페어가 노래할 때 가지고 가는 호흡 스타일이 내 연주 스타일과 가장 비슷하다. 내가 편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많이 배려해주시기도 했다. 최재웅-김무열 페어는 3, 4회 정도 같이 했는데 무척 좋았다. 정상윤-에녹 페어도 그렇고.
오성민: 최재웅-김무열 페어가 색이 워낙 진하고 명확하다. 하고 싶어 하는 게 뚜렷해서 좀 편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씩 말하려니…. 그냥 페어별로 장점을 이야기할 걸 그랬다.(웃음)

반대로 가장 맞추기 어려운 페어도 있었을 텐데.
오성민
: 힘들다기보다는 연주하면서 에너지를 좀 더 써야 하는 페어가 있다. 강필석-이율 페어의 연기 스타일이 다른 페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정에 충실하고, 직관적으로 호흡을 맞추는 타입이다. 그런 부분까지 세밀하게 맞추려면 아무래도 신경을 좀 더 써야 한다. 두 분도 그걸 인정하시는데, 나도 그렇게 따라가는 게 맞다 생각한다. 항상 정해진 대로만 하면 재미없다.
이범재: 사실 나는 다 힘들었다. 모든 페어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항상 부담감도 있었고.

서로의 연주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는지.
이범재
: 음악이라는 게 참 신기하다. 사람 성격이 연주에 그대로 드러난다. 성민 씨는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하다. 처음 ‘쓰릴 미’에 들어왔을 때, 악보를 보면서 잘 모르는 부분을 계속 물어봤다. 그때마다 성민 씨가 음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여기서 누가 어떤 대사를 치고 그 감정 노선이 어떻게 되는지 꼼꼼히 설명해줬는데, 무척 놀랐다.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이 나와 달라서 많은 도움이 됐다.
오성민: 내가 찰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범재 씨는 큰 그림, 큰 호흡을 일관성 있게 잘 가져간다. 세심하다는 면이 장점이기는 하지만, 스스로에게 있어서 조금 단점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놓칠 수 있는 부분을 범재 씨가 잡아주었다. 음악감독님도 둘을 반반 섞어놓고 싶다고 하시더라.

10주년 기념 공연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
오성민
: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 국내에도 얼마 없다. 큰 사고 없이 여기까지 온 것에 감사하고, 그런 작품을 하게 되어서 기쁘다. 대학 시절에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던 일이었는데, 얼떨결에 사랑을 받으면서 이렇게나 오래 하게 됐다. 그때만 해도 피아니스트가 극에 직접, 그것도 남자 피아니스트가 등장하는 작품은 없었다. 총 400회차 정도 참여한 거 같다. 장기 공연이라서 순간순간 나태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지는 시즌도 많았다. 하지만 뮤지컬을 통해 나를 알고 계신 분 중에는 ‘오성민 피아니스트’라기보다는 ‘쓰릴 미의 오성민’으로 알고 계시는 분이 훨씬 많고, 덕분에 이 장르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돼서 너무 감사하다.
이범재: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 내가 나에게 피드백을 하는 일이 흔치 않았는데, 이 작품을 하면서 그런 시간을 많이 보냈다. 나 자신을 쭉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참, 마지막 공연 날에 마무리 음을 딱 치고 나서 ‘끝났다!’는 생각에 손을 머리 위로 번쩍 들었는데, 암전이 생각보다 느리게 된 거다. (웃음) 사람들이 다 봤다고 한다. 그때 성민 씨도 공연을 보고 있었고, 얼굴이 보이기에 같이 자축하는 의미에서 손을 올린 거였다. 그런데 암전이 늦어질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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