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 너머의 가네코 후미코

2017.06.29
영화 ‘박열’은 1923년 독립운동가 박열이 일본 황태자 암살 혐의로 공판을 받는 과정을 그린다. 그의 동지이자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형 선고를 받는 순간까지 박열과 함께했던 인물로,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이 과정에서 본인이 남긴 옥중수기와 당시의 기록들, 그리고 후대의 연구들은 일본의 하층민, 특히 여성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의 투쟁은 천황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국가에서 한 명의 독립적인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는 2017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영화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정리했다.


호적 없는 아이

1903년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유년 시절 출생신고조차 되지 않은 ‘무적자’로 살았다. 유서 깊은 집안의 장남인 아버지가 산골 처녀인 어머니를 임신시키고도 아내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 7살이 된 후미코는 호적이 없어 학교에 갈 수 없었고, 매일 아침 ‘적갈색 윗옷을 입고 머리에는 크고 붉은 리본을 묶은’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이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아야 했다. 겨우 무적자도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찾아 입학했지만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를 마련하지 못해 3일간 결석을 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후미코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차별이었다. 출석을 부를 때 선생님은 한 번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남자 기모노를 빌려 입고 참석한 졸업식에서 남들이 딱딱한 종이에 인쇄된 수료장을 받을 때 혼자 붓글씨로 적힌 종이를 받았다. 가문을 중시하는 일본에서 무적자였던 후미코는 일찍이 온갖 부조리를 경험했고, 이는 그가 훗날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 영향을 끼쳤다. 법정에 선 후미코는 국가를 향해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무적자라는 이유로 그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게 법률입니다. 사회는 아무런 책임도 없는 아이를 채찍질할 정도로 잔인합니다(‘재판기록’)”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조선의 이민자
아버지는 외도와 가정폭력, 가출을 일삼다가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재혼을 했다. 9살이었던 후미코는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조선에 살고 있던 고모의 집에 양녀로 들어가 7년을 보냈다. 조선에 오기 전 “공부를 잘하면 도쿄에 있는 여자대학에 보내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던 할머니는 남들 앞에서 그를 손녀로 인정하지 않았고 점차 학대하기 시작했다. 조선에 왔을 때 후미코의 성은 고모부와 같은 ‘이와시타’였지만 반년 만에 다시 ‘가네코’로 바뀌었다. 그는 12세 무렵부터 집안의 하녀처럼 일했는데, 학교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으며 매를 맞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고리대금업과 아편밀수로 부를 축적한 일제시대 식민자 집안 속에서 후미코는 조선인 머슴 고씨에게 공감할 정도로 철저히 피지배층이었다. 그의 묘사에 따르면 고씨가 “옷이 한 벌뿐이어서 빨래를 하기 위해 하루 쉬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할머니와 고모는 그를 깔깔대며 비웃었다고 한다. 이후 1919년 3.1 운동을 목격한 후미코는 “그날 나 자신에게도 권력에 대한 반역적 기운이 일기 시작했으며 조선 쪽에서 전개하고 있는 독립운동을 생각할 때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습니다(‘재판기록’)”라고 설명했다. 스스로가 고통받는 약자였기에, 국적을 뛰어넘어 해방에 대한 열망에 누구보다도 깊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억압받는 여성
후미코는 열여섯 살이 되어 고모부의 집에서 쫓겨나듯 나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는 그에게 다짜고짜 결혼을 강요했다. 후미코를 외삼촌과 결혼시켜 재산을 얻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는 하고 싶은 공부 대신 신부 수업의 일환으로 ‘실과여학교 재봉전문과’에 다니게 되었으며, 아버지와의 갈등은 깊어졌다. 이에 대해 후미코는 훗날 ‘부모가 자식의 의지나 개성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아이의 생활방식을 결정하거나 정당화하는 것은 계급지배의 일환’이라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이 무렵 후미코는 극장에서 만난 청년과 자유연애를 시작했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결국 혼담은 파기됐다. 이 일로 그는 아버지에게 “화냥년”이라는 욕을 먹고 폭행을 당했다. ‘교사가 되어 경제적으로 독립한 후 좋아하는 학문을 하겠다’며 무작정 도쿄로 올라간 후미코는 한동안 작은외할아버지 댁에 신세를 졌는데, 그의 생각 또한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너는 지금 몹시 공부를 하고 싶겠지만, 선생님이 되어 봤자 생활이 되겠니? 그야 물론 독신일 때는 가능하겠지. 하지만 언젠가는 시집을 가게 돼. 아이가 생겨봐라. 배가 불러 학교에 가게 되면 모양새도 좋지 않아(‘옥중수기’)”.

사상에 눈을 뜬 고학생

작은외할아버지의 집에서 나온 후미코는 주경야독의 고된 생활을 이어갔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신문가판대 직원, 가루비누 노점상, 가정부 등의 일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다. 특히 후미코가 길거리에서 석간신문을 판매하던 시절, 이 가판 근처에서는 여러 사상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그는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허무주의자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본래 공부를 통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만이 목표였던 후미코는 ‘사람들에게서 훌륭하다는 말을 듣는 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바로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박열의 동지
후미코는 ‘청년조선’에 실린 박열의 ‘개새끼’라는 시를 접하고 그에게 운명적 끌림을 느껴 먼저 동거를 제안했다. 두 사람은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대등한 관계였는데, 1922년 도쿄에 방문했던 후미코의 어머니가 “그때 후미코는 단발머리에다 조선옷을 입고 남자용 가방을 메고선 거의 하루 종일 어딘가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니까 박열과의 생활은 남녀 두 사람이긴 했어도 지극히 사이가 좋은 두 남자가 함께 사는 세대처럼 보였습니다”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뻔뻔스러운 조선인’이라는 잡지를 통해 일본의 권력자들에게 ‘불령선인(뻔뻔스럽고 무례한 조선인)’으로 불리는 조선인들의 무고함을 일본 민중에게 알렸고, 저항의식을 가진 조선인과 일본인 모임인 불령사를 조직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함께 구속된 두 사람은 감옥 안에서도 투쟁을 이어나갔다. 후미코는 법정에서 “박열이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설령 재판관의 선고가 우리 두 사람을 나눠놓는다 해도 나는 결코 당신을 혼자 죽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재판기록’)”라고 선언하거나 옥중서신을 통해 지인에게 “혹시 여유가 있어서 나에게 줄 게 더 있다면 그것은 P(박열)에게 주었으면 합니다. P에게 뭘 좀 먹여주고 싶어요”라고 부탁할 만큼, 박열을 뜨겁게 사랑했다.

굴복하지 않은 사상가
후미코는 일본의 천황제에 저항하는 아나키스트였다. 사상가로서 그는 박열과 동지였지만,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둔 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어린 시절 경험으로 인해 조선인들의 처지에 깊은 공감을 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재판 과정에서 후미코는 천황제의 부조리함에 논리적으로 반박했고 일곱 차례의 전향 요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믿었고, 권력의 대표자인 천황과 황태자는 이러한 평등을 해치는 존재로 보았다. 또한 ‘국가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의 국가관에 대해 “권력자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 민중의 생명이나 자아를 박탈시키는 것(‘재판기록’)”이라며 정면으로 맞섰다. 결국 1926년 3월 25일 후미코와 박열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4월 5일 천황은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주었다. 이는 천황제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었고, ‘국가권력이 부여한 삶’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후미코는 7월 23일 형무소에서 자살했다. 국가에 굴복하지 않고, ‘나’로서 살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참고 도서
‘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 산처럼
‘나는 나’ 가네코 후미코. 산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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