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에 가다

2017.07.17
지난 15일 시청 광장에서 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벌써 한국에서 18번째 열린 축제지만 존재 자체를 잘 모르거나, 알고 있다 하더라도 굳이 가야겠다는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기사의 작성자 역시 처음으로 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해 일년에 단 하루 열리는 이 날의 일들을 기록했다.


PM 12:30

당초 계획은 부스가 오픈되는 11시에 입장하는 것이었지만, 입을 옷을 고민하다 1시간 반이나 늦어버렸다. 전날 밤부터 나의 정체성이나 개성을 반영할 옷을 생각했지만 답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최대한 편안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시청 광장 근처에 도착하자, 여느 때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광장에 벽을 치고, 입구를 따로 만든 광경이 생경했다. 입구가 어딘지도 몰랐던 탓에 ‘LOVE IS WIN’이라는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의 뒤를 무작정 따라갔는데, 시청 모퉁이에 다다르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이미 이 축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PM 13:30
펜스 안으로 들어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프라이드 뱅글을 배부하는 부스였다. 너무나 가지고 싶었지만, 어리석게도 현금을 가져오지 않았다. 다른 부스에서도 사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1시 반부터 시작되는 강명진 조직위원장의 공식 인터뷰에 가기 위해 프레스 부스로 향했다. 그에 따르면 이번 축제는 뚜렷한 이유 없이 시청 광장 사용 허가를 받지 못해 본래 계획보다 한 달 이상 늦어진 지금에야 열렸다고 한다. 또한 예산도 부족했다. 반면 그 어느 때보다 규모는 커졌고, 처음으로 ‘국가인권위원회’가 참여했다. 강명진 조직위원장은 “예전에는 성소수자들만이 참여하는 축제였다면 이제는 국가인권위원회를 비롯해 정당, 대사관, 사회단체, 자원봉사자 등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며 기뻐했다. 

PM 14:30

퍼레이드 환영무대는 남녀 이반 풍물패 연합 ‘바람소리로 담근 술’의 공연으로 시작됐다. 가면을 쓴 공연자들은 비에 젖은 잔디밭을 무대삼아 신명난 가락을 선보였는데, 공연 직후 무대에 오른 사회자들은 오늘 이곳을 ‘워터파크’라고 생각하고 즐겨달라고 했다. 다 함께 “나중은 없다! 지금 우리가 바꾼다”라는 올해의 구호를 외치고 나니 한차례 비를 맞은 뒤였지만 오히려 기분이 상쾌해졌다. 환영무대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의당 이정미 대표의 축사였다. 당대표가 된지 3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이 자리에서 ‘동반자법’과 ‘동성혼합법화’를 약속했다.

PM 15:30
강명진 조직위원장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국가인권위원회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스티커와 배지를 나눠주는 부스에서, 신홍주 홍보협력과 소통협력팀장은 축제에 참여한 계기에 대해 “성소수자인권문제에 관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 전에는 참여하기에 어려운 점이 너무 많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시청 광장에 들어오기 전 마주쳤던 동성애를 혐오하는 이들의 ‘국가인권위원회를 폐지하라’는 피켓이 떠올랐다. ‘성소수자 가족구성권 보장을 위한 네트워크’ 부스에서는 류민희 변호사를 만났는데, 그는 ‘희망법’에 대해 이 법이 동성커플도 결혼을 할 수 있는 ‘평등결혼’은 물론, 이성커플이 비혼을 선택하더라도 대안을 누릴 수 있는 ‘파트너 제도’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그는 대만의 ‘동성혼 합법화’를 언급하며 같은 날 한국에서는 동성애자 대위가 징역을 선고받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젊은 성소수자들이 한국과 외국을 비교하며 많은 절망을 느끼고 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이 나라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국가차원에서 이 문제에 개입해야하는 이유다”라고도 말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부스를 나서는데 마침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비에 젖은 채 현수막을 들고 있는 중년 남성에게 말을 걸었더니 ‘라라(2014년부터 성소수자 부모모임에서 활동 중인 트랜스젠더 딸을 둔 엄마)’의 남편이라는 소개와 함께 나지막한 한마디가 돌아왔다. “평소엔 일하느라 바빠서 못해주니까 오늘은…. ”

PM 16:30

4시가 되자 쉼터 역할을 하던 부스가 철거되고, 퍼레이드를 시작한다는 사회자의 안내가 들려왔다. 이번 퍼레이드는 총 4Km로 역대 최장거리인데다 11년 만에 종로대로가 포함, 더욱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트럭을 발견한 축제 반대 세력의 목소리도 더욱 커진 반면, 축제 참여자들의 노래와 환호성도 커졌다. 그리고 출발선에 서 있던 무지개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행진이 익숙해지니 그제야 퍼레이드 밖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문드문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만약 이 퍼레이드 밖에 있었다면,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PM 18:30
다리는 퉁퉁 부었고, 신발은 연신 물을 뱉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가기에는 아쉬워 느긋하게 부스를 돌아봤다. 6시가 넘으니 파장한 부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시끌벅적했다. 주로 굿즈를 팔아 후원금을 마련하는 방식이었는데, 이 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고민을 공유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스티커를 부착할 수 있는 앙케이트 판넬을 배치하거나, 전문가가 있는 부스에서는 간단한 상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기독교 부스가 모여 있는 곳에서는 금발의 ‘지저스’가 동성커플과 인증샷을 찍고 있었다. 가짜 지저스도 이렇게 사랑이 넘칠 진데, 진짜 지저스가 이들을 사랑하지 않을 리 없다. 또다른 부스에는 페미니스트가 있고, 장애인이 있었으며, 세월호도 있었다. 이 안에서 성소수자들은 물론, 평등을 갈망하는 모두가 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출구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은 뒤, 숭례문을 지나면서 세상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인데 세상은 완벽하게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펜스 바깥으로 나와 노래하고 춤추며 거리를 걷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이제서야, 그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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