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만의 와일드월드

‘닥터 후’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2017.07.24



‘스타워즈’의 데이지 리들리, ’로그 원’의 펠리시티 존스, ‘헝거 게임’의 제니퍼 로렌스, ‘매드맥스’의 샤를리즈 테론, ‘고스트버스터즈’에 나온 네 명의 여주인공까지. ‘BBC’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적어도 최근 SF 영화에선 여성 배우들이 유리 천장을 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넓게 보자면, 판타지 세계인 ‘왕좌의 게임’에선 여성들이 리더 역할을 맡고 있고, 슈퍼 히어로 영화 ‘원더우먼’은 남자들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영화만이 아니다. 지난해, 최우수 과학 소설과 환상 문학 작품을 뽑는 휴고상에선 여성들이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젠, 시간을 넘나들며 온 우주를 여행하는 외계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국의 SF 시리즈인 ‘닥터 후’까지 이런 변화를 받아들였다. ‘닥터 후’를 방영하는 ‘BBC’는 지난 17일, 조디 휘태커가 13번째 닥터를 맡게 됐다고 발표했다. 1963년 첫 시즌이 방영된 이후 36시즌이 지났고, 총 12명의 닥터가 재생성한 이후 탄생한 첫 여성 닥터다. 닥터의 타임머신 타디스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조디 휘태커는 외계인 사회의 유리 천장을 깬 셈이다.

     

지난 1월, 12대 닥터인 피터 카팔디가 드라마에서 하차하겠다고 한 후, 13대 닥터가 여성이 될 것이라는 얘기가 없진 않았다. 이미 닥터의 라이벌 캐릭터인 마스터를 미시라는 여성 캐릭터로 바꾼 제작진의 시도가 있었고, 그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같은 타임 로드인 마스터가 여성으로 재생성했으니, 닥터라고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지 말란 법은 없다. 지난 36시즌 동안 닥터는 어떤 인물이든 될 수 있었다. 6번째 닥터였던 콜린 베이커가 조디 휘태커의 캐스팅을 축하하며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얘기하듯, 닥터는 수많은 재생성을 거치며 어떤 캐릭터로든 변해왔다. 젊을 때도 있었고, 나이가 많을 때도 있었다. 닥터는 스코틀랜드 억양을 가진 적도 있고, 심술궂을 때, 무책임할 때도 있었다. 천진난만할 때도, 무례할 때도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여성이었던 적은 없었다. ‘닥터 후’가 변화와 모험에 대한 이야기임을 생각하면, 이제서야 여성 닥터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너무 늦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BBC’는 닥터가 여성이라는 것이 불만인 이들의 항의에 “배우와 작가, 제작진의 새로운 생각과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불어넣는 것이 시리즈가 오래갈 수 있었던 비결입니다.”라며 조디 휘태커가 닥터에 적임자라고 대답했다. 메리엄-웹스터는 불만을 품은 이들에게 “영어에서 닥터라는 단어는 성별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한편으론 ‘닥터 후’ 시리즈의 진일보를 굳이 애써 깎아내리는 언론도 있었다. 영국의 타블로이드 ‘더 선’과 ‘메일 온라인’은 조디 휘태커가 13대 닥터라는 소식이 알려지자 휘태커의 과거 누드 사진을 기사로 내서 비판을 받았다. 조디 휘태커는 여성 닥터를 깎아내리려는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는지, ‘BBC’와의 인터뷰에서 “팬들에게 내 성별에 겁먹지 말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팬들은 대단히 많은 변화를 겪었고, 이번의 변화는 그저 새롭고 다를 뿐, 무서워할 것이 아닙니다.”라는 휘태커의 말은 옳다. 또한 휘태커는 “페미니스트로서, 여성으로서,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그리고 계속해서 자신을 밀어붙이고, 자신에게 도전하는 사람이자,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하는 주변의 이야기에 갇혀 있지 않은 사람으로서, (닥터가 된 것이) 대단히 기쁘다.”고 말했다. 조디 휘태커가 연기하는 닥터의 모습은 올해 크리스마스가 되어서나 볼 수 있겠지만, 이 말만 들어도 벌써부터 ‘닥터 후’의 세상이 좀 더 다채롭고 넓어진 느낌이 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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