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가 역사를 다루는 법

2017.07.28


역사적 사실을 다룬 영화가 관객에게 제안하는 위치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 상황을 냉철하게 관조하는 자리. 둘, 인물들의 감정을 뜨겁게 경험하는 자리. 셋, 인물들의 고통을 구경할 수 있는 안전한 자리. ‘군함도’가 가진 최초의 동기는 아마 2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화는 관객을 3번의 자리에 자주 앉힌다. ‘군함도’는 군함도라는 이미지 자체에 매혹된 영화처럼 보인다. 군함도의 다양한 공간들은 스펙터클의 장치로 활용되며, 카메라의 시선은 지속적으로 세트의 위용을 훑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영화 속 공간이 원본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군함도라는 역사적 공간을 볼거리로 소비하고 있다는 의심은 짙어진다.

 

오프닝의 몰입은 대단히 좋다. 그럴 수밖에 없다. 군함도의 실상이 얼마나 끔찍한지 극적인 이미지로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소년이 들어가도 허리조차 펼 수 없는 낮고 좁은 개미굴의 모습과 훈도시를 입은 채 땀과 검댕으로 범벅이 된 소년의 육체가 이 영화의 강렬한 첫인상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군함도로 끌려가게 될 주요 인물들을 만난다. 악단장인 이강옥(황정민)과 그의 어린 딸 소희(김수안)가 등장하는 공연 장면에서는 오프닝의 충격적인 이미지를 잠시 잊을 정도의 여유와 익살이 제공된다. 그들은 불행히도 군함도행 배에 타게 되는데, 거기서 경성 제일의 주먹 최칠성(소지섭)과 과거 위안부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던 오말년(이정현)이 소개된다. 여기까지는 매끄럽다. 하지만 배가 군함도에 도착한 후부터 영화는 급격히 덜컹거리기 시작한다. 군함도의 비극을 스크린 위에 비장하게 새기고 싶은 욕망과 군함도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영화적 쾌감을 선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가 목욕탕 액션 신이다. 지금껏 모든 것을 완력으로 해결해온 최칠성은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노무계원과 일대일 몸싸움을 제안한다. 일본 치하에서 조선인끼리의 권력 다툼이라는 비통한 상황과 최칠성만의 생존방식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신일 것이다. 하지만 이 액션 신은 지나치게 길고 과시적이다. 이강옥 부녀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잔악한 착취의 현장으로 막 끌려 온 참이고, 특히 소희는 성인 남성들을 상대해야 하는 유곽으로 보내진 상황이다. 오프닝을 통해 인물들보다 먼저 이곳의 참상을 목격한 관객들은 지금 불안하고 위태롭다. 그런데 별안간 액션이라는 엔터테인먼트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벌거벗은 두 남성이 목욕탕에서 벌이는 원초적인 맨몸 액션은 그 자체로 썩 훌륭하다. 즐겨야 하는가, 아니 즐길 수 있는가. 이 유희의 순간은 당혹스럽다.

 

조선인 여성들이 강제로 끌려간 유곽 장면의 묘사 또한 그렇다. 수위 높은 성적 행위나 클로즈업된 신체가 등장하는 수준은 아니다. 다만 일본인 남성의 손이 조선인 여성의 뒷덜미를 쓰다듬는 컷, 어깨를 주무르는 컷, 육회를 입에 넣고 씹는 컷 등을 차례로 쌓아가며 불쾌감을 점층적으로 끌어올린다. 그 현장에 진한 화장을 하고 기모노를 입은 어린 소희가 앉아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선정적이다. 공범으로서의 죄의식마저 느껴진다. 영화가 모사해낸 공간이 원본에 가깝다면 여기서 벌어지는 이야기 또한 그에 걸맞은 공기와 밀도, 무게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영화 속 사건들은 간단히 세 파트로 요약 분류될 수 있을 정도로 도식적이다. 거칠게 말해 이강옥 부녀는 약간의 코미디가 가미된 휴먼 드라마, 최칠성과 오말년은 액션 멜로, 독립운동가를 구하러 온 광복군 요원 박무영(송중기)은 첩보 스릴러를 담당하고 있는 듯하다. 실제 역사와 호흡하고 서로 간에 공명하는 사건들의 유기적 조합이라기보다는 긴 러닝타임을 오락적으로 지탱하고 블록버스터를 소비하는 다양한 관객층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위한 기능적 배열에 가깝다.


군함도에서 착취당하고 다치고 맞고 총검에 쓰러지는 조선인들의 신체를 사실감이라는 명목하에 노골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일본의 악행에 동참한 개인들을 처단하듯 잔혹하게 살해하는 장면과 욱일기를 반으로 가르는 직접적인 장면은 또 어떤가. 감정을 고조하고 일시적인 쾌감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이는 돌아서면 곧 휘발될 허무한 이미지일 뿐이다. 역사의 비극을 구경거리 삼는다는 혐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류승완 감독이 담보 삼은 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군함도의 비극 앞에서 거의 자동적으로 느낄 분노와 슬픔이다. 그러나 ‘군함도’는 이를 넘어서는 류승완 감독만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 관점의 빈약함을 메우기 위해 영화적 볼거리와 과잉의 수사가 동원되고, 관객은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끼며, 역사는 도구화될 운명에 처한다.

 

‘베테랑’은 시민들로 둘러싸인 번화가 한복판에서 일개 형사가 재벌 3세의 뺨을 후려치는 해결 방식을 취했다. 현실에서는 이렇게 일이 간단히 해결될 리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판타지라는 암묵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카타르시스가 가능했다. 즉, 통쾌함이 용인됐다. 하지만 ‘군함도’는 이런 방식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없는, 혹은 간단히 느껴선 안 되는 아픈 역사를 딛고 선 영화다. 영화적 쾌감이 앞서는 순간마다 이 영화의 욕망은 결코 윤리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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