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남자들

2017.08.04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기사단장 죽이기’의 주인공은 ‘나’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에서 종종 남자 주인공을 이르고, 그들은 어딘가 비슷한 모습을 가졌다. ‘나’가 아닌 이름을 가진 남자 주인공들 역시 마찬가지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부터 ‘기사단장죽이기’까지, ‘나’를 비롯한 작품 속 남자들을 통해 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시놉시스: ‘나’는 대학생 시절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갔던 18일 동안을 회고한다. 당시 ‘나’는 J의 바에서 쥐라는 별명을 가진 친구와 술과 잡담을 나누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바 화장실에 쓰러져 있는 여성을 발견하고 그녀를 집에 데려다주게 된다. 이 ‘왼쪽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는 아가씨’와 ‘나’는 점차 가까워진다.
살아 있는 작가의 소설은 읽지 않는 남자: “의식을 잃은 여자와 자는 놈은 최악이라고.” ‘왼쪽 손가락이 네 개밖에 없는 아가씨’는 그렇게 말했다. ‘나’가 실신한 그녀를 집으로 데려가 강간했다고 오해했기 때문이다. 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섹스와 강간을 구분하지 못하거늘 그래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나’는 의식을 잃은 여자와 자는 인간은 아니다.
동시에 ‘나’는 어째서 소설을 읽느냐는 친구 쥐의 질문에 “살아 있는 작가는 아무 가치도 없으니까”라고 답하며 폼을 잡는다. 나름 고상한 취향이라고 할 수도 있고 문제 삼을 일은 아니지만, 종종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 남자들이 이 괴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할 때가 있다. 하루키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야말로 하루키의 소설을 읽지 않을 남자들이니 말이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시놉시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두 세계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SF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는 서른다섯 살의 이혼한 남자로 무의식을 이용하는 보안기술자인 계산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실험한 과학자 탓에 첩보전에 휘말리게 된다. 일련의 소동 속에서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와 세계의 끝의 ‘나’의 연관성이 하나둘 밝혀진다.
자기객관화는 잘해서 살아남은 남자: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는 여성을 초대하고 잘 만든 요리를 대접하면서 상대가 맛있게먹는 모습에 뿌듯함을 느낀다. 한 끼에 대접한 음식만 소고기 찜/데친 양하 나물/강낭콩 깨 무침/우메보시로 드레싱을 한 샐러드/구운 두부/된장국/프랑크프루트 소시지/초콜릿 케이크 등이다. 손이 많이 가는 요리는 아니지만 어찌나 즐거운 식사였는지 다 먹고 섹스하다 발기가 안 되는데 서로 웃고 넘어갈 정도다.
그리고 이 ‘나’는 150명가량의 계산사 중 성장 과정, 성관계, 가족관계, 건강 등 다양한 지표로 점수를 매겨서 뽑은 상위 스물여섯명의 실험대상 중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이기도 하다. ‘나’가 딱히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서 살아남은 것은 아니고, 다른 실험대상들은 자아를 객체화해서 인식하지 못하고 정신적인 면역력이 모자랐기에 전부 죽었을 뿐이다. 자기객관화가 안 되면 그냥 죽어버리는 세계다. 하드보일드. 그리고 과학자의 말에 따르면 이 세계에서 자기객관화가 되는 사람은 주인공 한 명이 유일하다고 한다. 원더랜드.

노르웨이의 숲

시놉시스: 서른일곱 살인 ‘나’가 18년 전 대학시절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나’는 고교 시절 자살한 친구의 연인인 나오코를 만나고 몇 차례 데이트를 하지만 그녀의 생일날 첫 섹스를 한 뒤로 그녀와의 연락이 끊기게 된다. ‘나’는 대학에서 알게 된 1학년 미도리와 가끔 데이트도 하고 선배와 헌팅도 하지만 나오코에 대한 감정을 놓지 못한다. 그런 와중 요양병원에 입원한 나오코와 연락이 다시 닿게 된다.
가끔은 씻지 않는 남자: 미도리의 남자친구는 미도리가 짧은 스커트를 입거나 흰색이 아닌 속옷을 입으면 화를 냈다. 미도리가 소속되었던 포크송 동아리의 남자들은 맑스의 철학에 대해 토론하고 자본론을 공부하면서도 여자들은 집회에 남자들이 먹을 주먹밥을 만들어 오라고 강요했다. ‘나’의 선배이자 부잣집 아들인 나가사와는 연인 하쓰미를 버려두고 언제나 다른 여자들을 헌팅한다. 나오코의 첫 연인이었던 기즈키는 나오코를 단 한 번도 성적으로 흥분시키지 못했다.
반면 ‘나’는 일단은 씻는 게 디폴트다. 가끔은 아니지만. 미도리가 입은 짧은 스커트가 예쁘다고 해줬다. 기숙사에 입고 왔을 때는 타박하기는 했지만. 나가사와랑 같이 열심히 술 마시고 헌팅을 하고 다녀도 끝까지 자기는 좋아하는 여자한테 헌신하겠다고 다짐했고 하쓰미의 죽음에 도취된 나가사와에게 분노했다. 큰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오코를 단 한 번은 성적으로 흥분시켰다. 단 한 번이었지만.

댄스 댄스 댄스

시놉시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3부작의 주인공이었던 ‘나’가 또 등장한다. 여기서 ‘나’는 삿포로에 들렀던 이루카 호텔에 자신이 종속되었다고 느껴 그곳을 다시 한 번 찾아간다. 이루카 호텔은 돌핀 호텔로 바뀌어 있었고‘나’는 어떤 사정으로 호텔에 홀로 남은 열세 살 소녀 유키를 도쿄의 집으로 데려다주게 된다. 그리고 도쿄로 돌아온 그의 주변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죽음이 이어진다.
열세 살 소녀와 데이트하는 남자: ‘댄스 댄스 댄스’의 남자들은 대부분 열세 살 소녀 유키의 감평을 받는다. 유키가 보기에 자신의 아버지 마키무라 히라쿠는 재능이 없는 작가이며 부녀의 문제를 돈을 주는 것으로만 해결하려 하는 소인배다. 어머니의 연인인 딕 노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얼간이다. ‘나’의 동창이자 유명배우인 고탄다는 그가 나온 영화만 봐도 살인자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유키가 좋은 사람이며 친절하다 호평하는 사람은 ‘나’ 뿐이다. ‘나’ 역시 유키를 이제까지 데이트한 여자 중 제일 예쁘다고 추켜세운다. 그리고 ‘나’는 유키와의 관계를 우정이라고 정의 내린다. 서른넷의 남자가 열셋의 소녀를 차에 태워 락 음악을 들으며 드라이브를 하고 훌륭한 식당에 데려가고 하와이로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지만 어디까지나 우정일 뿐이라고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키의 소설에는 초월적 지각을 가진 어린 소녀와는 데이트만, 경험이 풍부한 성인 여성과는 섹스만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무얼 하고 싶은지 뻔히 보이니, 눈가림은 전혀 되지 않지만 말이다.

해변의 카프카

시놉시스: 소년 카프카와 노인 나카타의 모험담. 카프카의 어린 시절 그의 어머니는 집을 떠났고 카프카의 아버지는 카프카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성교할 것이라 예언한다. 그 후 열다섯이 된 카프카는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되기로 다짐하고 가출을 한다. 나카타는 어린 시절 초자연적인 체험 끝에 기억을 잃고 정신적 발달이 멈춘 채 노인이 되었다. 나카타는 환상 속에서 살인을 저지른 뒤 어디론가 홀린 듯 여행을 떠난다.
얻어먹으며 사는 남자: 카프카는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라기보다는 세상에서 가장 ‘기둥서방’ 자질이 있는 열다섯 살 소년에 가깝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오이디푸스 신화의 예언처럼 카프카가 자신을 죽이고 그의 어머니와 성교하리라 저주했지만 카프카 본인부터가 어머니 같은, 누나 같은 여자를 볼 때마다 신나서 들러붙고 이것저것 보살핌을 받는다. 어쩌면 아버지의 예언은 저주가 아니라 아들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소망을 응원한 것일지도 모른다.
노인 나카타 역시 이것저것 잘 얻어먹는다. 청년 호시노는 나카타에게 너무나도 호감을 느낀 나머지 그의 여정을 돕기 위해 직장마저 그만둔다. 이 전개에는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나카타는 스스로를 3인칭으로 부르며 고양이와 대화를 할 줄 알고 누구에게나 존칭을 쓰는, 무척이나 ‘모에’한 노인이기 때문이다.

1Q84

시놉시스
: 암살자 아오마메와 소설가 지망생 덴고의 사랑 이야기. 아오마메와 덴고는 초등학교 동창으로 서로의 인생에 큰 영향을 남겼으며 상대방을 유일한 사랑으로 여김에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연락이 두절된 사이다. 하지만 아오마메가 사이비 종교단체선구의 리더를 처리하라는, 덴고가 선구와 관련된 비밀이 적힌 소설 '공기 번데기'의 수정과 재구성을 하라는 의뢰를 받으면서 두사람의 운명은 다시 한곳으로 수렴하기 시작한다.
궤변을 늘어놓는 남자: 주인공 덴고가 수정을 맡게 된 작품 '공기 번데기'의 원작자는 아름다운 열일곱 살의 소녀 후카에리다. 덴고는 후카에리를 가슴이 크고 모양이 예쁘다며 실컷 관음하면서도 자신이 성적으로 접근하지 않았다고 여긴다. 게다가 후카에리의 적극적인 유혹에 덴고는 (남자가 당하는 쪽으로의) 강제에 가까운 섹스를 하게 된다.
후카에리는 ‘으헤헤 아저씨 입으로는 싫다지만 몸은 다르게 말하는걸?’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적극적으로 덴고를 유혹한다. 하지만 덴고는 하자는 건 다 하면서 발기하고 싶지 않다느니 뭐라느니 궁시렁 거린다. 이후 후카에리가 덴고와 섹스를한 이유는 종교단체 선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이형적 존재 리틀피플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고 시공간을 초월해 아오마메를 임신시키기 위함이었다는 진실이 밝혀진다. 이렇게까지 어린 소녀와 섹스하고 싶어 난리를 치면서 정당화도 하고 싶어 궤변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노라면 화가 나기보단 애잔해진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시놉시스: 서른여섯 살의 철도회사 직원인 쓰쿠루는 고등학교 시절 나고야의 동네 친구 넷과 절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그가 나고야를 떠나 도쿄의 대학으로 진학하길 다짐한 뒤 이 그룹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결국 쓰쿠루가 고향으로 돌아온 어느 날 그는 영문도 모른 채 그룹의 멤버 전원으로부터 절교 선언을 듣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된 그는 연인의 조언에 따라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 진상을 듣기로 결심한다.
답은 정해졌으니까 너는 대답만 하면 되는 남자: 쓰쿠루의 옛 친구들은 모두 이름에 색과 관련된 한자가 들어있다. 쓰쿠루는 스스로를 색이 없는, 무언가 결여된 사람이라 여기지만 정작 다시 만난 옛 친구들 대부분은 자신이 참 모자란 인간이며 쓰쿠루를 동경했음을 고백하기 바쁘다. 그 시절 쓰쿠루가 가장 잘 생겼었네, 그룹의 중심이었네, 냉정했네, 쿨했네, 가장 먼저 어른이 되어 떠났네 등등.
읽다 보면 다자키 쓰쿠루가 과오를 돌아보는 순례가 아니라 얼마나 정당했는지 확인받는 팬미팅으로 느껴진다. 쓰쿠루가 다른 사람 앞에서 스스로를 과도하게 낮추고 상대방의 입으로부터 너는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을 즐기는 답정너 대화가 반복될 뿐이니 말이다.

기사단장 죽이기

시놉시스
: 서른 중반의 초상화가인 ‘나’는 아내에게 급작스러운 이별통보를 받고 집을 나온다. ‘나’는 초상화 작업을 쉬려고 하지만 백발의 신사인 멘시키로부터 거액을 대가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게 된다. 작품이 완성되자 멘시키는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멘시키가 예전에 사귀었던 여성의, 또 어쩌면 멘시키의 딸일지도 모르는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한테 접근하기 위함이었음을 고백하며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손에 피를 묻히는 남자: ‘나’와 멘시키는 닮은 점이 많다. 둘 모두 취향이 있고 예절을 지키며 배려하는 법을 안다.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겪었으면서 상대방이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를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공통된 경험이 있다. 하지만 멘시키가 사실을 확인하다 상처를 입을까 두려워 그 아이의 삶을 방관만 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선택이라는 답에 이른다.
‘기사단장 죽이기’의 ‘나’는 하루키의 다른 주인공들과 비교했을 때 손꼽히게 주체적인 인물이다. 이데아의 현현인 기사단장이라는 조력자를 두고 있을 뿐 타인의 명령이나 부탁 혹은 인도에 따르는 것이 아닌 윤리관으로 움직인다. 무엇보다도 그는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한다. 이제까지 하루키의 세계에서 방관만 하는 ‘나’는 사라지고 선택하는‘나’가 새로이 등장한 것이다. 여전한 하루키의 주인공 같으면서도 조금은 나아갔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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