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즙상’ 다음, ‘가시나’의 메이크업

2017.09.18
뷰티 유튜버 이사배가 지난 4일 올린 ‘선미 가시나 메이크업’ 영상은 일주일 만에 조회 수 140만 건을 돌파했다. 아모레퍼시픽의 대표 브랜드인 헤라는 지난 1일 출시한 ‘루즈홀릭샤인, 338호 원 퍼펙트 레드’에 ‘선미 컬러’란 별칭을 붙여 자사 온라인몰에서 판매하고 있다. 선미가 지난 8일 뷰티 전문 유튜브 채널인 딩고뷰티에서 소개한 헤라의 ‘센슈얼틴트: 댄싱로즈’는 일부 온라인몰에서 일시 품절됐다. 물론 이런 인기의 진원지는 독특한 메이크업으로 화제가 된 ‘가시나’ 뮤직비디오다.

‘가시나’ 뮤직비디오 속 선미의 메이크업은 한눈에 확 띈다. 숙취 메이크업의 변형인 이른바 ‘과즙상’ 일색인 요즘, ‘과즙미 팡팡’ 같은 제목이 붙을 여지를 원천봉쇄했다. 그는 크게 세 종류의 메이크업을 선보였는데, 첫 번째 얼굴은 황혼 무렵 나른하게 카페에 앉아 크림을 잔뜩 얹은 음료를 마시는 장면에 등장한다. 눈두덩이에 펴 바른 레드오렌지 아이섀도, 발그스름한 뺨은 언뜻 과즙상을 연상시키지만 위장막일 뿐이다. 이 메이크업의 주인공은 아이라인 그리듯 또렷하게 덧바른 블루그린 아이섀도다. 요사이 드물었던 색 조합은 파스텔 톤 상의, 그윽한 채광 효과와 어우러져 독특한 정조를 자아낸다. 두 번째 얼굴은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에 대한 오마주가 분명한 장면에 등장한다. 단호하게 그은 일자 눈썹, 채도를 확 낮춘 입술, 머리에 얹은 붉은 장미, 화면을 가득 채운 빛바랜 장미 꽃밭. 신체적 불편에도 불구하고 예술혼을 불태웠던 여성 예술가의 이미지는 “꽃같이 살래, 나답게”란 가사와 결합, ‘가시나’ 화자의 내면을 드러낸다. “정말 미친 거 아냐”라며 떠나버린 연인을 원망하면서도 이내 각자도생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는 야무진 여성상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세 번째 얼굴은 오간자 핑크 탑, 플라워 프린트 스윔수트 등 빠른 속도로 다양한 의상을 소화한 후반부에 배치했다. 의상에 따라 미세하게 수정 메이크업을 선보였지만 이 얼굴들은 하나의 기조 아래 통일성을 부여받는다. 바로 골드 글리터를 듬뿍 얹은 눈매와 입술을 꽉 채우듯 선명하게 표현한 레드립이다. 입술선을 따라 성실하게 색을 채우는 ‘풀 립’ 방식은 선미의 매력을 배가시킨다. 과즙이 자연스럽게 스미거나 번진 것처럼 표현하는 게 대세인 상황에서 눈길을 잡아끌 수밖에 없는 방식이다.

세 가지 메이크업이 모두 가능한 원동력은 물론 선미의 얼굴이긴 하다. 피부, 얼굴 선, 종종 귀여워 보이는 눈밑 애교살 등에서 모두 메이크업이 어울릴 만한 조건을 가진 데다 타원형을 그리며 내려간 눈꼬리와 뚜렷하고 풍성한 입술선 등을 가졌다. 선미의 이목구비가 계속 회자되는 이유다. ‘지루한 잘생김’이 아니라 ‘독자적인 예쁨’을 가진 얼굴이랄까. 그런데 ‘독자적인 예쁨’에는 필연적으로 다양성이 따라붙는다. 이를테면 아이유의 ‘팔레트’ 뮤직비디오 속 버건디 메이크업은 눈매를 붉게 물들이는 도발적인 이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아직도 회자된다. 여성들은 색조 메이크업이 일상성과 의외성의 패권 다툼이란 점을 잘 알고 있다. 증명사진용, 면접용 메이크업을 열심히 따라 하면서도 다 쓰지도 못할 78색 색조 팔레트를 사 모으며 색조 메이크업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믿는다.

하지만 시장은 다변화된 소비심리에 제대로 화답하지 못한다. 업계는 지난해부터 시작된 과즙상 쏠림 현상을 부추기기 바쁘다. ‘색조’라는 미끼 상품을 스킨·로션·에센스·크림이란 고단가 ‘기초’ 제품 매출로 연결시키려는 강박관념 아래 마치 과즙미가 유일한 미의 기준인 양 ‘사과맛 입술’, ‘과즙이 흘러내릴 것 같은 뺨’ 식의 홍보 문구를 남발한다. 화장품 브랜드 릴리바이레드는 Mnet ‘프로듀스 101 시즌 2’ 출신 권현빈을 내세운 화보를 통해 ‘과즙상’의 영역을 남성 아이돌로 확장하기도 했다. 걸그룹 소속사의 패션·뷰티 공식도 이미 ‘스쿨룩+과즙상’으로 굳어진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엇비슷한 인상이 재생산된다. 그리고 “하나의 인상을 향해 전력 질주하라”는 시그널에 질린 여성들은 차라리 1990년대 메이크업으로 눈을 돌린다. 아이유가 지난 8일 공개한 앨범 ‘꽃갈피 둘’선 티저 사진이나 지난 12일 공개한 ‘꽃갈피 둘’ 티저 영상 속 이미지는 모두 잔잔한 반향을 불러왔다. 말린 장미 꽃잎 같은 색깔로 입술을 채웠지만 적어도 핑크·오렌지·레드 범벅은 아니었다. 선미의 ‘가시나 메이크업’도 1990년대 화장 기법을 곳곳에 차용하긴 마찬가지였다. 보아가 지난 6월 ‘CAMO’ 뮤직비디오에서 했듯 얼굴을 도화지 삼아 CG로 색조의 향연을 벌이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곱게 단장한 여성의 얼굴을 굳이 먹거리에 비유하는, 획일화된 색조 메이크업이 미의 표준인 양 제시되는 기묘한 시대가 어서 끝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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