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제사 파업

2017.09.25
셔터스톡
제사 준비용 장을 보는 척하며 집안의 모든 여자들을 봉고차에 태우고 잠적해버렸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타임라인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실화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지만 진위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누군가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들었고 그것이 통했고 기대한 것을 이뤄냈다는 자체가 여성들에게는 신화였다.

제사를 치르는 데에 투입되는 노동이 여성에게만 집중되어 있고 이것이 차별적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는 것 같다. 1994년 9월 17일자 신문에도 “주부들에게는 몸살을 앓아야 할 정도”의 스트레스라는 기사가 실려 있고 이런 류의 기사는 해마다 명절 시즌만 돌아오면 징글징글하게 반복되어 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현실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일까. 어째서 여전히 여성에게만 지워지는 명절 노동이 문제라는 ‘지적’만 수십 년째 반복되어오고 있는 걸까.

봉고차 탈주를 감행한 큰엄마 이야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집안의 모든 여자들”과 함께 했다는 점이다. 나는 뼈가 으스러지게 일하는데 남자들은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뒹굴거나 하루 종일 TV만 보다가 모든 준비가 끝나면 겨우 절이나 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면 큰엄마 혼자 집을 나갔어도 됐다. 하지만 큰엄마는 알았을 것이다. 내가 이 자리를 비운다면 집안의 다른 여성, 그러니까 자신의 동서, 시어머니, 조카, 며느리가 그 공백을 메우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남자들은 변함없이 방바닥과 한 몸이 되어 굴러다닐 것이라는 걸.

나는 간혹 ‘저는 제사를 거부하겠습니다’ ‘저는 명절에 시댁에 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선언하는 자신을 상상하곤 한다. 사실 못할 것도 없다. 잠시 소동이 일어나고 누군가는 며느리 도리를 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누군가는 실망하고 싫은 소리가 오고갈 테지만 그 모든 ‘분란’을 잠시 모른 척하고 참아낼 수만 있다면 영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까지나 ‘상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그 모든 ‘도리’들을 거부한다면 내 몫으로 분류되었던(내가 결혼하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카테고리지만) 노동을 결국 시어머니 혼자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것을 거부하면 이 부당한 문화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부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또 다른 여성에게 옮겨갈 뿐이다.

큰엄마 이야기에 열광하는 여성들을 보며 ‘제사를 내팽개치고 도망칠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는 의견도 나왔다. 앞서 언급한 94년의 기사에서도 대화를 통해 “시댁의 전통적인 문화와 주부의 생각을 절충해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애초에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고 기리는 의식에 정작 해당 조상들의 직계후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남의 집 사람들의 손을 빌려 의례를 치르는 것에 어떤 타당성이나 합리성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대화”라는 것을 통해 과연 어떤 “논의”가 가능하단 말인가. 제사라는 의식 자체가 철저하게 가부장 권력에 의해 유지되어온 풍습인데, 정 그렇게 힘들면 대화를 통해 해결하라니 세상에 이렇게 안일한 ‘솔루션’이 또 있을까.

노동의 수혜를 입는 사람들에게 절박한 문제의식을 요구하는 건 무리일 것이다. 결국 여성에게 필요한 건 연대뿐인지도 모른다. 내가 도망치면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가중된다. 그들의 룰을 따르자니 노동하는 육체가 죽겠고 발을 빼자니 죄책감에 시달리는 정신이 죽겠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아주 단순해진다. 모두가 감내하고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하거나, 모두가 이 제사라는 의식을 거부하는 것. 도대체 제사에 절충안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물을 7개에서 5개로 줄이는 것? 전을 5종에서 3종으로 줄이는 것?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제사 때 부엌에 발도 안 들이는 님들이 협상을 하냔 말입니다. 한계에 도달했다는 신호는 도처에 널려 있다. 이 신호를 읽지 못한다면 더 이상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미풍양속’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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