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문희, 김해숙, 김혜옥이 엄마일 때와 아닐 때

2017.10.11
지난 9월 개봉한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는 새롭고도 의미 있는 캐릭터를 보여줬다. 나문희를 비롯해 중년을 넘어선 여성 배우들에게 가장 흔하게 주어지는 배역은 엄마이며, 이는 그들의 연기 스펙트럼을 제한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배우들은 때때로 이를 뛰어넘고, 우리에게 여성 배우들의 역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엄마의 얼굴로 익숙하지만 때로는 낯선 얼굴로 돌아보게 만드는, ‘엄마 배우’들의 다양한 모습을 정리했다.


1941년생 나문희

엄마일 때, ‘엄마의 치자꽃’ 윤자

노희경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한 MBC 베스트극장 ‘엄마의 치자꽃’에서 나문희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엄마 윤자를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혼자 남겨질 딸 희수(양정아)를 더 걱정하는 엄마이자, 가족을 버리고 떠나간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였다. 이후 나문희는 가족과 인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작품에서 여러 차례 엄마 역할을 맡아왔다. 그가 오랫동안 공연한 뮤지컬 ‘친정엄마’에서는 비슷한 인생을 살게 되며 서로를 깊게 이해하게 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보여주었으며, 연극 ‘잘자요 엄마’에서 역시 자살을 결심한 딸과 마지막 밤을 보내는 엄마 델마로 출연했다. 뮤지컬 ‘서울 1983’에서는 한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전형적인 어머니상 돌산댁을 연기했다. 주로 무대를 통해 절절한 모성 연기를 선보였던 나문희는 희생적인 ‘국민엄마’ 이미지를 갖게 됐다.

엄마인데 조금 독특할 때, ‘거침없이 하이킥’ 나문희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나문희가 맡은 역할은 식모살이를 하던 집 도련님과 결혼해 젊은 시절에는 시어머니에게 갖은 구박을 당하고, 나이 든 후에는 똑똑한 며느리의 눈치를 보는 할머니였다. 이러한 설정은 얼핏 평범한 할머니 캐릭터처럼 보이지만 그는 ‘아주 가끔 간헐적으로 발작한다’는 특징을 맛깔스럽게 살려 ‘호박고구마’처럼 재미있는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이에 앞서 방영된 KBS2 주말드라마 ‘소문난 칠공주’에서 나문희가 맡은 남달구 역할은 젊은 시절 여러 남자를 전전하다가 나이 들어서 딸에게 얹혀사는 밉살맞은 할머니였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있을 때 잘해’를 부르며 가족들의 일에 끼어들었고, 결국 주연 배우는 물론 시청자들마저 그를 따라 ‘돌리고~ 돌리고~’를 흥얼거리게 만들었다. 나문희가 종종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도우너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그 나이대 배우로서는 드물게 명랑만화 주인공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역할들의 영향이 크다. 이는 그가 영화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이나 ‘육혈포 강도단’, ‘수상한 그녀’ 등 코미디 영화의 주연을 맡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엄마 말고 용감한 증언자일 때, ‘아이 캔 스피크’ 나옥분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나문희가 연기한 나옥분은 자신을 감추어야 했던 위안부 피해자인 동시에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웃 할머니다. 나문희는 동네 사람들에게 ‘도깨비 할머니’라고 불릴 만큼 괴팍한 면모와 박민재(이제훈) 형제에게 저녁을 차려줄 정도로 인정 많은 모습을 변덕스럽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용역업체 직원을 추궁하고 돌아서다가 생라면을 먹는 박영재(성유빈)를 발견하고 “라면은 끓여 먹는 거여”라고 무심하게 한마디 던지는 것처럼. 나문희는 이제껏 쌓아온 연기 경험을 충분히 활용해 다양하고 복잡한 성격과 사연을 가진 나옥분을 연기했고, 이는 진실이 드러나며 영화가 아예 다른 국면으로 전환되는 ‘아이 캔 스피크’에서 마침내 빛을 발한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법정 씬’에서는 입을 떼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다가 곧 용기를 내어 품위 있고 당당하게 증언을 하는 나옥분의 모습이 그려진다. 늘 단편적 피해자로 묘사되던 위안부 캐릭터는 나문희로 인해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표현됐다. 그리고 나문희는 자신이 엄마가 아니어도 충분히 관객을 공감시킬 수 있는 배우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1955년생 김해숙

엄마일 때, ‘아버지가 이상해’ 나영실

KBS2 주말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김해숙은 1남 3녀의 엄마이자 말 못 할 비밀을 간직한 변한수(김영철)의 아내 나영실을 연기했다. 드라마 초반에는 살림 전반을 담당하는 변한수에 비해 나영실의 괄괄한 성격이 부각되며, 친정 엄마는 물론 남동생 가족까지 건사한다는 설정과 건물주인 오복녀(송옥숙)에게 맞서는 등 여장부다운 모습이 강조됐다. 하지만 변한수의 비밀이 밝혀지고 갈등이 깊어지며, 나영실은 눈물 마를 날 없는 처연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는 그는 변한수가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는 안중희(이준)를 찾아가 “용서해달란 말 안 하겠어요. 다만 그냥 이대로 덮어주면 안될까요. 이제 우리 아들 공무원 됐는데”라며 무릎을 꿇고, 유방암으로 수술이 시급한 상황에서도 남편의 재판을 우선시한다. 영화에서 김해숙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오태식(김래원)을 양자로 받아들이는 ‘해바라기’의 양덕자를 비롯해 수많은 남성 배우들의 엄마를 연기하기도 했다. 강인한 인상의 김해숙은 선 굵은 남성 중심 영화에 캐스팅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위대한 모성은 영화 속에서 주인공의 각성이나 정신적 성장의 계기가 되곤 했다.

엄마인데 조금 독특할 때, ‘희생부활자’ 명숙
영화 ‘희생부활자’에서 김해숙은 살해당한 후 7년 만에 부활한 미스테리한 엄마 명숙으로 변신했다. 이 작품을 통해 김래원과 세 번째 모자연기를 선보이게 된 그는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는 초자연적 존재’면서 ‘그 누구보다 강렬한 모성을 지닌 엄마’라는 전례 없는 캐릭터를 특유의 폭발하는 에너지로 단숨에 납득시킨다. 아들의 전셋돈을 들고 가다 살해당했던 명숙이 살아 돌아와 아들에게 던지는 첫 마디는 “밥 안 먹었지?”로 평범한 엄마의 모습이지만,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상대역인 김래원조차 진심으로 당황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를 내뿜으며 식칼을 들고 달려든다. ‘희생부활자’에서 김해숙은 영화 ‘박쥐’에서 보여줬던 귀기어린 시어머니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극의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영화 내내 감춰왔던 비밀이 밝혀지며, 그는 온몸을 불사르는 듯한 절절한 모성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토록 수많은 엄마를 연기했던 김해숙이 또 다시 새로운 엄마를 완성해낸 것이다.

엄마 말고 사랑에 빠진 여성일 때, ‘경축 우리사랑’ 봉순
김해숙은 영화 ‘경축! 우리사랑’에서 억척스러운 엄마 봉순으로 분했다. 다만 그가 이제까지 연기했던 엄마들과는 다르게, 봉순은 자신의 감정에 누구보다도 솔직한 여성이었다. 영화에서 봉순은 딸 정윤(김혜나)의 약혼자 구상(김영민)과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고 21살 연하인 그에게 푹 빠지게 된다. 강인하면서도 희생적인 엄마를 주로 맡아왔던 김해숙이 가족이나 남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만을 바라보는 모습은 순수하거나 혹은 뻔뻔하게 그려지며 묘한 몰입감을 선사했다. 영화 ‘도둑들’에서 중국 도둑들의 리더 첸(임달화)과 사랑에 빠지는 씹던 껌을 연기할 때도 김해숙은 딸의 이혼과 자신의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엄마인 동시에 매혹적인 로맨스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러한 역할들을 통해 그는 다양한 얼굴을 보여주며 엄마도 욕망하는 여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상기시켰다.

1958년생 김혜옥

엄마일 때, ‘황금빛 내인생’ 양미정

김혜옥은 KBS 주말드라마 ‘황금빛 내인생’에서 주인공 서지안(신혜선)의 엄마, 양미정 역을 맡았다. 남편 서태수(천호진)의 사업 실패로 오랫동안 생활고에 시달려온 그는 자신의 친딸인 서지안을 재벌가의 잃어버린 딸로 위장해 새 삶을 살게 만든다. 드라마에서 흙수저 부모를 대표하는 그가 ‘친딸 바꿔치기’라는 엄청난 짓을 저지르는 이유는 단 하나, 모성 때문이다. 이러한 가난한 엄마 역할은 김혜옥이 유독 많이 맡아온 것이기도 하다. KBS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그는 딸 송은채(임수정)가 짝사랑하는 최윤(정경호)의 엄마 오들희(이혜영)의 영원한 시녀 장혜숙이었고 KBS 드라마 스페셜 ‘연우의 여름’에서 연기한 박순임은 빌딩 청소부로, 그의 딸 이연우(한예리)는 다친 엄마를 대신해 청소를 나가야 했다. 억척스럽게 일해도 결코 자식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없는, 김혜옥이 보여준 가장 전형적인 엄마의 얼굴이다.

엄마인데 조금 독특할 때, ‘더 테이블’ 숙자
영화 ‘더 테이블’에서 김혜옥의 존재는 여러모로 눈에 띈다. 이 영화에 출연한 네 명의 여성 배우 중 세 명의 엄마를 연기하기도 했던 그는 ‘더 테이블’에서도 누군가의 엄마인 숙자를 연기한다. 단 그의 상대역은 진짜 딸이 아니라 생전 처음 마주하게 된 가짜 딸 은희(한예리)다. 결혼사기꾼인 은희가 자신의 진짜 결혼을 앞두고 자신의 엄마 역할로 숙자를 섭외하는 이 에피소드에서, 그는 엄마이자 여자로서 은희의 입장을 누구보다 깊게 이해한다. 숙자가 은희가 구해준 옷 대신 자신이 딸의 결혼식에 입으려고 사두었던 옷을 입겠다고 하거나, 자연스럽고 따뜻하게 은희의 별명을 부르는 장면은 모정을 넘어선 여성들 간의 연대와 공감을 보여준다. KBS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서 김혜옥이 연기한 신윤희 역시 엄마 세대보다는 딸 한여름(정유미)의 세대에 더 가까운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딸에게 매달 하숙비를 받아 챙겼으며, “뇌가 섹시하다는 말 어떻게 생각하냐”라며 은근히 떠보는 배민수(안석환)의 말에 그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다. 못생긴 남자들이 죄다 자기가 뇌가 섹시하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정도는 돼야 뇌가 섹시한 거다”라고 받아쳤다. 이는 전형성과는 거리가 먼, 담백하지만 통찰력 있는 여성 캐릭터의 발견이었다.

엄마 말고 두 얼굴의 정치인일 때, ‘투윅스’ 조서희
MBC 드라마 ‘투윅스’에서 김혜옥이 맡은 조서희 역할은 ‘한국의 마더테레사’라고 불리는 여당 3선 국회의원이었다. 겉으로는 존경받는 정치인이었지만 그 속은 조직폭력배와 연계해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이중적인 인물로, 김혜옥은 이제껏 맡아왔던 히스테릭한 악역과는 결이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김혜옥은 스위치가 켜지듯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 조서희의 모습을 노련하게 표현하며 극 초반 시청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고, 극의 마지막 순간까지 쉽게 무너뜨리지 못할 악역으로서의 존재감을 뽐냈다. 재미있는 점은 여러 작품에서 엄마를 연기했던 그가 부성애로 모든 시련을 극복하는 장태산(이준기)과 대립했다는 것이다. 다소 서늘한 구석이 있는 김혜옥의 얼굴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준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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