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의 선택

2017.10.12
1984년생, 만 33세 배우 이제훈은 소위 주연급으로 인정받는 또래의 남성 배우들과 조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에 걸친 남성 배우들이 한류 스타 선배들과 거대한 스케일을 갖춘 영화에 출연하거나 로맨틱 코미디의 주역으로 떠오르는 동안, 그는 영화 ‘박열’이나 ‘아이 캔 스피크’에서 기꺼이 다른 배우의 서포터가 된다. “내가 주목받는 것보다 메시지가 좋은 작품을 하고 싶다”던 이제훈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더 주목받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제훈의 선택은 옳았다.


친 청소년의 얼굴, 파수꾼(2010)

영화 ‘김종욱 찾기’에서 배우 임수정의 후배로 나와 깔끔하고 귀여운 인상으로 주목받은 이제훈은 정작 주연을 맡은 ‘파수꾼’에서 어둡고 우울한 소년을 연기했다. ‘파수꾼’ 속 기태라는 인물은 폭력, 오토바이, 담배 등 모든 일탈적 요소를 체득한 비행 청소년이었고, 심지어 영화는 기태가 죽은 이유를 추적하는 아버지(조성하)의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간혹 트렌디 드라마나 청춘의 반항적인 이미지를 강조한 작품에서는 폭력을 멋들어진 남성성으로 미화해 대중의 비난을 받곤 한다. 하지만 ‘파수꾼’은 주먹이 오가는 싸움과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저지르는 거짓말 등 청소년기에 저지르는 폭력적인 사건들에 대해 쉬이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다만, 영화에서 친구에 대한 엇나간 집착 때문에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을 일삼는 주동자였던 이제훈은 외로움에 관심을 갈구하는 청소년의 양면성까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자신의 영향력을 시험하고자 하는 10대의 치기 어린 허세, 또래 집단으로부터의 소외, 질투 등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이 작품은 이제훈이라는 배우의 얼굴이 대중에 널리 알려진 계기다.

1분 50초의 존재감, 고지전(2011)

이제훈이 연기한 신일영은 전투 현장에 즐비한 남성들의 성적인 농담에도 일체 가담하지 않는 무뚝뚝한 성격이다. 휴전이라는 소식에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듯이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얼굴은 함께 부대를 이끌던 김수혁(고수)의 시신 앞에서 마침내 흔들리고 만다. 습관적으로 모르핀을 주사해 아픔을 잊으려던 그는 “아프면 아픈 대로 그냥 울라”는 강은표(신하균)의 말에 처음으로 소리 내 울음을 터뜨린다. 이제훈이 12시간의 마지막 전쟁에 투입될 때 보여주는 절망적인 표정은 결국 목숨을 담보받지 못한 모든 6.25 전쟁 병사의 얼굴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빨갱이랑 싸우는 게 아니고 전쟁이랑 싸우는 거라고.” 이 영화에서 이제훈이 가장 많은 분량을 받은 부분은 후반에 악어 중대라는 별명의 기원을 설명하며 아군에게 ‘빨갱이’가 아닌 ‘전쟁’과의 최후통첩을 알리는 1분 50초 남짓한 장면이다. 어린 대위 신일영의 입에서 나오는 “살아서 집에 가자.”는 대사는 남성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빤한 한마디가 아니다. 가장 말 없는 캐릭터가 뱉어낸 각오는 전쟁의 모순과 고통을 응축한 말이었고, 이 영화에서 최소의 분량으로 가장 돋보인 배우 이제훈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 한마디였다.

익숙한 첫사랑의 설렘, 건축학개론(2012)

영화 ‘건축학개론’의 승민은 그때까지 이제훈이 맡은 역할 중에 가장 일상적이면서 평범한 주인공이다. 서연(수지)이 미래의 집 계약금이라며 손때 묻은 전람회의 CD 한 장을 쥐어 줘도 설레어하고, ‘GUESS’의 글자가‘GEUSS’로 뒤집힌 티셔츠를 입고도 몰랐던 서툰 청춘. 납뜩이(조정석)가 말도 안 되는 연애 비법을 전수하자 스킨십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질겁하기도 한다. 이처럼 로맨틱한 구석이라고는 잘 찾아볼 수 없지만,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연아!”를 외치는 그가 신나게 뛰어다니는 동안, 관객은 자신의 스무 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네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했잖아.”라는 서연(한가인)의 말에 현재의 승민(엄태웅)이 “내가 그런 유치한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우기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건, 이제훈이 연기한 과거의 승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훈이 ‘시그널’을 통해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을 연기하기 전, 가장 밝고 풋풋한 연기를 보여준 순간.

김혜수와 조진웅 사이, 시그널(2016)

tvN ‘시그널’의 프로파일러 박해영과 함께 이제훈도 성장했다. 청소년기와 갓 스물이 된 청춘을 주로 연기하던 그는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프로파일러로 분해 김혜수와 조진웅 사이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인물이 되었다. “죽은 사람을 보는 건 앞으로도 계속 힘들 것”이라 조언하는 차수현(김혜수)에게 감동받기는커녕 “처음이 아니다. 사람 죽은 거 본 거”라며 대꾸하는 까칠함을 지녔지만, 아픈 과거의 기억 때문에 누구보다 범죄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경찰이었다. 초반에는 오랜만에 드라마에 복귀하는 김혜수와 여러 작품에서 강한 인상을 남긴 조진웅에게 밀릴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왔던 게 사실이다. 특유의 대사 톤에 대해서도 “감정을 과장하는 것 같다”는 일부의 비판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훈의 격앙된 톤은 차수현과 이재한(조진웅)의 우직한 성격과 박해영의 까칠하고 섬세한 성격이 대비되는 지점을 또렷이 보여주었다.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데에 서툴기만 했던 캐릭터가 성실한 주변인들을 만나 치밀하게 범죄의 끝을 추적하는 데에 성공했다. 박해영의 성장 서사는 이 대비로 인해 가능했던 것일지도.

깜찍한 버디 무비,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2016)

이제훈이 출연했던 영화 중에 외형적으로 가장 스타일리쉬한 작품을 꼽으라면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일 것이다. 신비롭지만 건조한 톤의 화면에 동화적으로 설정된 캐릭터들이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이 작품은 홍길동조차 일반적인 히어로와는 다른 특징을 가졌다. 매사에 불만이 많고 삐딱한 감성을 지닌 그는 할아버지를 잃고 우는 어린 자매를 보고서도 ‘원수의 역겨운 자식’이라 생각하고, 화려한 액션보다는 잔머리와 술수에 강하다.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에 ‘짠!’ 하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멋진 포인트도 없다. 대신 이제훈은 이 영화에서 두 소녀와 한 세트로 같이 움직이며 그들의 당돌하고 귀여운 매력이 부각될 수 있게 뒷받침한다. 순진한 아이들을 이용해 어머니를 죽인 김병덕(박근형)에게 복수하려고 했던 그가 오히려 그들의 간섭에 속절없이 휘둘린다. 점점 꼬여가는 거짓말 앞에서 절절매는 홍길동을 멀뚱히 바라보는 두 꼬마는 조금 모자란 영웅의 완벽한 파트너다. 깜찍한 버디 무비 같은 느낌까지 풍기는 이들의 파트너십에 악랄한 강성일(김성균)조차 한두 번은 기꺼이 속아준다. 하필이면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개봉 시기가 비슷했던 게 아쉽다.

멋진 여성 캐릭터와의 만남, 박열(2017)

‘박열’ 오프닝에서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읊는 목소리는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의 것이다. 박열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역할을 맡은 가네코 후미코에게 먼저 시선이 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배우자가 없으면 동거하자”며 당차게 손을 내미는 가네코 후미코는 한국 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낯선 캐릭터다. 그의 모습에 먼저 반하고 나서야, 꾀죄죄한 모습으로 웃는 이제훈이 눈에 들어온다. 후미코라는 인물이 박열을 넘어서는 존재감을 과시하는 이 영화에서, 이제훈은 꾸준히 한 발 뒤로 물러선 위치를 지킨다. 인물 개인의 성격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도 박열에 비해 급진적인 쪽에 가까웠던 가네코 후미코를 통해 더욱 성숙해진 남자 박열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다. 사실 시종일관 머리가 산발인 채로 등장하는 박열은 젊은 남성 배우들 다수가 매력을 느끼는 신사적이고 멋진 남성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의 표현처럼 박열은 언제나 “거지 같은 모습”을 하고서 일제에 저항했던 독특한 인물이고,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가 아닌 영화에서도 남녀 캐릭터가 완벽한 파트너십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냈다. 관객에게 낯설었던 새로운 역사적 인물이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메시지를 중시한 선택, 아이 캔 스피크(2017)

“(내가 돋보이는 것보다) 중요한 건 사람들에게 작품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그 작품에 담긴 메시지가 무엇인지다.”(씨네21) ‘아이 캔 스피크’는 이제훈의 선택이 왜 옳았는지 보여주는 가장 적확한 예로 남을 듯하다. 영화에서 이제훈이 분한 박민재는 착실하며 똑똑한 9급 공무원으로, 평범한 직업인의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다. 덕분에 박민재의 삶에 끼어든 할머니 나옥분(나문희)의 인생이 한층 절절하게 빛난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박민재가 젊은이의 입으로 위안부와 관련한 역사적‧사회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구구절절 설명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위안부였던 옥분이 직접 나서서 입을 열 수 있게 돕는 조력자로, 역사적인 아픔을 멀찌감치 바라보기만 했던 젊은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한다. 단순히 훌륭한 노배우의 서포터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외면해왔던 노인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성찰하게끔 만드는 인물인 것이다. 유쾌한 옥분의 곁에서 점차 자신의 과거를 극복하고 건강해지는 그의 모습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이제훈은 33세의 젊고 매력적인 배우가 할 수 있는 일보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한다. 그것이 그의 선택이 갖는 진짜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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