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땐뽀걸즈’ 이승문 감독 “결국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2017.10.16
영화 ‘땐뽀걸즈’는 춤추는 아이들과 선생님의 이야기다. 취업을 앞둔 아이들은 장래와 아무 상관 없는 ‘땐뽀(댄스 스포츠)’에 몰두하고, 선생님은 이런 아이들을 계도하기는커녕 함께 어울려 춤을 춘다. 현실감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지만, 이 이야기는 6개월 동안 성실하게 촬영된 다큐멘터리다. 구조 조정의 칼바람이 부는 거제시의 풍경을 담기 위해 내려갔던 이승문 감독이 발견한,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을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

영화 개봉에 앞서 KBS를 통해 방영됐었다. 그때도 이미 다큐멘터리라기보다는 청춘 영화 같았다.

이승문
: 일반적으로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단히 극적인 상황에 처해 있지만, ‘땐뽀걸즈’ 아이들은 그렇지 않아서 기존과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했다. 촬영 감독과 상의 끝에 6mm 카메라 대신 시네마 카메라를 쓰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실제 영화처럼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서 카메라가 정확한 위치에 있지 않거나 적절한 렌즈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완성본을 보니 아쉽기는 했지만 영화의 탈을 쓴 다큐멘터리라 극복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웃음)

영화관에 상영하면서 30분가량이 늘어났다. 무엇이 가장 달라졌나?
이승문
: 영화 버전은 내가 맨 처음 만들었던 75분짜리 가편집본과 거의 비슷하다. 그 후 내부 시사를 거쳐 55분 길이로 다시 편집했고, ‘좀 더 TV다웠으면 좋겠다’는 내부 의견에 따라 인터뷰 장면 등을 추가했다. 그래서 영화화가 결정됐을 때 원래 의도했던 것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뻤다. 영화 버전에서는 민방위 훈련이나 강아지에게 고기를 주는 장면처럼 맥락상 중요하지 않더라도 자잘한 현장감을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을 많이 넣었다. 또 방송에서는 제목이 ‘땐뽀걸즈’이기 때문에 이규호 선생님과 관련된 장면들을 많이 편집할 수밖에 없었는데, 영화에서는 좀 더 선생님이 부각됐다.

영화에서 이규호 선생님이 부각되며 많은 관심을 받고 있더라.
이승문
: 처음에는 선생님이 정말 좋은 분이시고 개인사 자체도 재미있는 부분이 많아서 그를 중심에 놓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촬영이 결정된 직후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하지 말자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자신이 하자고 해서 혹시라도 하기 싫은 아이가 억지로 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셨다는 거다. 거의 본능적으로 아이들을 보호하려는 태도가 있다. 선생님과 함께 거제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으면 조금 과장해서 100미터마다 한 번씩 제자거나 제자였던 아이들이 다가온다. 그럼 선생님은 “밥은 먹었나?”라면서 만 원 한 장씩 쥐여 주신다. 하지만 선생님이 절대 자신이 부각되는 걸 원치 않으셨고, 만약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계도되는 대상처럼 보일 것 같아서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이규호 선생님에게 “고기가 상했다”며 면박을 주고, “장가가도 되겠다”며 놀리기도 한다. 일반적인 사제 관계와는 달라 보이는데.
이승문
: 실제로 땐뽀반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관계가 평등하다. 평소에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거의 반말을 할 정도다. 선생님은 뭔가 결정할 일이 있으면 꼭 아이들을 모이게 해서 난상토론을 벌인다. 아이들에게 결정권을 주는 거다. 몰래카메라에서 선생님이 왜 고마운지 묻자 은정이가 “그냥 선생님은 우리랑 같이 지내잖아요. 다른 선생님들은 우리랑 안 지내잖아요”라고 이야기하는데 정말 그 말대로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게 선생님에게도 가장 중요하고, 그렇게 서로의 무게 추가 맞으니까 평등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첫인상은 어땠나.
이승문
: 처음에 연습실에 둥글게 앉혀놓고 “나는 KBS PD인데 조선소를 취재하러 왔다. 너희는 졸업하면 조선소에 취업한다는데 요즘 어떠니?”라고 했더니 다들 그렇게 시큰둥할 수가 없었다. (웃음) 낯을 가리는지 말도 거의 안 하기에 ‘이건 안되겠다’라고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연습을 시작하니 아이들 표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게, 여름날 해는 어둑어둑 져 가는데 연습실 밖에서 잠깐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 안에서는 음악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는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그때까지 ‘스윙걸즈’나 ‘훌라걸즈’ 같은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이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다.
이승문
: 카메라가 자길 찍고 있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냥 평소처럼 행동하더라. (웃음) 미디어에서 여성 청소년은 영재 아니면 문제아로 구분되거나 쉽게 대상화된다. 그래서 더 있는 그대로 찍으려고 했다. 만약 이 아이들이 나쁘게 보인다면 그건 전적으로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가진 선한 에너지를 충분히 표현하고자 했고, 그래서 술 담배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본질을 훼손하지는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평범하지 않은 사연을 가진 현빈이가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이승문
: 현빈이는 촬영을 시작하기 일주일 전에 ‘땐뽀’반에 들어왔고 아르바이트 때문에 연습에 빠지는 일도 잦았다. 처음부터 다른 아이들과 뭔가 눈빛이 달라서 마음이 쓰였는데 그게 무엇 때문인지는 몰랐다. 나중에서야 현빈이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다. 결정적으로 현빈이와 시영이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게 된 것은 대회 전날 벌어진 두 아이의 다툼 때문이다. 당시 시영이의 아버지는 조선소를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거제시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바로 그 아버지의 부재가 굉장히 상징적이라고 생각했다. 현빈이가 지금껏 겪어온 결핍이 곧 시영이에게 일어날 결핍이었으니까.

시영이는 화를 내면서도 현빈이를 걱정스럽게 쳐다봤고, 종업식 후에는 현빈이에게 매니큐어를 발라준다. 아이들 사이의 감정과 관계를 잘 보여주는 장면 같다.
이승문
: 시영이가 화를 내고 나서 코를 긁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넣을지 말지 끝까지 고민했다. 사실 긴장감을 위해서는 그 장면을 빼는 게 낫다. 그런데 빼고 나니 계속 찜찜하더라. 결국 그 사소한 행동이 시영이의 화나면서도 미안한 감정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매니큐어를 발라주는 행동에도 두 사람의 성격과 관계가 잘 드러나 있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시영이는 네일 아티스트가 꿈이라, 아르바이트 때문에 화려한 색을 바를 수 없는 현빈이의 손톱에 투명 매니큐어를 발라준 거다. 약간 터프한 느낌의 두 아이가 그러고 있는 게 재미있기도 하고 참 그들답다는 생각도 했다.

거제시의 무거운 현실은 지현이와 시영이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아이들은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
이승문
: 당연히 아이들도 거제시의 현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이 느끼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생각해보면 IMF가 터졌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는데, 친구 부모님 사업이 망하고 이사를 가는데도 그 사실을 뉴스에서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같지는 않다. 내가 알게 된 건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는 거다. 그게 댄스 스포츠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거제시의 풍경을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표현한 건가?
이승문
: 우연히 찍힌 한 장면 때문에 그런 식으로 표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연습이 끝나고 다 같이 밥 먹으러 가려고 버스정류장에 서 있는데, 선생님과 아이들 앞에 버스 한 대가 딱 멈추는 거다. 그 버스에서 조선소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들이 우르르 내리는 걸 보고 ‘이거다’ 싶었다. 이 아이들의 삶에 거제의 풍경이 묻어나듯 찍고 싶었다.

원래 기획은 ‘거제시의 조선업 몰락’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였다고 들었다.
이승문
: 거제시의 노동자들을 취재하던 중 우연히 거제여상에 가게 됐고, 아이들을 만나 완전히 방향이 바뀌었다.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아이들을 통해 거제시나 여러분의 삶을 한 번쯤 생각해달라”는 거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닿으려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기관차의 동력이 중요한데, 다큐멘터리의 경우 메시지가 너무 무거워서 정작 알맹이가 가벼워지는 경우가 많다. 이 아이들의 에너지가 거기에 눌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이들에게 ‘땐뽀’는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나.
이승문
: 지켜야 하는 작고 예쁜 것. 나는 남자 중학교를 다녔는데 체구도 작고 힘도 약해 괴롭힘을 많이 당했다. 필통에 색깔별 볼펜을 채워 넣고 필기할 때마다 뭘 쓸지 고민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걸 발견한 친구들이 “여자 같다”고 놀리면서 창밖으로 집어 던진 적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그냥 내버려두고 집으로 갔다.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때가 자꾸 생각나더라. ‘그걸 버리지 말걸. 묵묵히 주워올걸.’ 내가 지키지 못한 것을 이 아이들은 지키며 살고 있는 거다. 그게 정말 멋있는 거고.

아이들이 원하는 건 정말 사소한 것 같다. 선생님은 그게 뭔지 알고 있는 어른이고.
이승문
: 촬영하면서 느낀 게, 아이들이 많이 목말라 있다는 거다. 진심 어린 관심이 느껴지면 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빨아들인다. 사실 옆에서 지켜보면 아이들이 많이 위태롭다는 걸 알 수 있다. 조금만 발을 헛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실제로 촬영하는 동안에도 아이들 주변에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어른들이 이 아이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위태로운 시간을 붙잡아서 버티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땐뽀’가 없었다면 아이들은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분명 후회가 남았을 텐데 이규호 선생님은 아이들이 후회 대신 추억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규호 선생님이나 치킨 한 마리를 더 가져다준 통닭집 사장님도 정말 좋은 어른 같더라.
이승문
: 영화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분은 이규호 선생님의 첫 ‘땐뽀’ 제자다. 선생님이 뭘 하는지 알고 계시니까 그런 식으로 응원을 하신 것 같다. 사실 그분이 통닭집에서 ‘땐뽀’를 추는 모습도 정말 찍고 싶었는데 결국 못 찍었다. 나에게도 다행히 좋은 선생님이 계셨다. 고등학교 신문부 활동을 할 때 두발자유화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가 학교가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는데, 초임이었던 담임선생님이 나를 자기 자취방에 데려가서 보듬어주셨다.

스스로를 좋은 어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
이승문
: 이번 촬영을 하면서 어떻게 해야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다. 결국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번에 아이들에게 배운 것은 ‘낄끼빠빠’를 알아야 한다는 거다. (웃음) 그리고 어른들이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한 번쯤 돌아봤으면 좋겠다. 나란 사람이 어떤 시간 속에서 도움과 지지 혹은 상처를 받으며 어른이 되었는지를 생각한다면 청소년을 보는 시각도 달라지지 않을까. 특히 일부 미디어에서 청소년을 다루는 방식은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부산 여중생 폭행 사건을 다룰 때도 그저 자극적인 영상을 반복해서 소비하고 있더라. 미디어에 종사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제작자들이 자기가 가진 태생적 한계에 대해 고민을 좀 했으면 좋겠다. 주류라고 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제작자들은 40-50대 남성이고, 그들의 편견이나 입맛에 맞게 많은 대상들이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감독이니까 내가 맞아’라는 생각이 아니라 ‘내가 대부분 틀리고 그들이 맞아’라는 생각을 가지는 게 특히 중요한 것 같다.

‘땐뽀걸즈’가 자신에게 어떤 작품이 된 것 같나.
이승문
: 개인적으로 다큐멘터리는 감독의 순수한 창작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감독이 발견하고 편집하기는 하지만, 그 이야기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거다. 어느 순간부터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가 존재한다고 믿고 그것을 찾아내는 일에 게을러진 것 같다. 뭔가를 찾고 느끼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그림을 생각해보고 거기 맞춰서 만드는 거다. 이번 작업을 하며 매일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기록하다 보면 내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게 결국 다큐멘터리가 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도 지켜야 할 선이 있었나.
이승문
: 내 경우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결국은 예의나 윤리의 문제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혜영이는 정말 털털해서 뭔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친구였다. 그런데 아이들마다 돌아가면서 집을 한 번씩 찍었는데 혜영이네 집은 찍을 날짜까지 잡아놓고서도 몇 번이나 취소가 되는 거다. 그러다가 나중에 혜영이가 내게 찍기 싫은 이유를 이야기하더라. 이게 바로 내가 지켜야 할 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촬영하지 않았다.

촬영 당시 고2였던 아이들이 이제 고3이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이승문
: 몇몇은 취업을 했다. 거제시에서 봤던 회색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쩔 수 없이 감상적이 된다. 그렇게 반짝이고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던 아이들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고 하니까. 그래도 취업 나가기 직전까지 ‘땐뽀’를 계속했다고 들었다.

다음에는 무엇을 다루고 싶나.
이승문
: 어쩌다 보니 아이들을 많이 찍었는데, 조금 다른 나이대의 인물들을 찍어보고 싶다. 기획안을 쓰다 만 것은 치매에 걸리신 분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언젠가 청년들의 연애도 찍어보고 싶다. 꼭 엄중한 메시지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당신의 ‘땐뽀’는 무엇인가?
이승문
: 지금 나한테는 트위터다. (웃음) ‘땐뽀걸즈’에 관련된 관객들의 트윗을 집요하게 찾아내서 생명수처럼 받아 마시고 있다. 홍보도 할 겸 수시로 리트윗하고 있는데, 감독이 이러는 게 엄청 눈에 띄는 행동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웃음) 사실 KBS PD로서는 내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접할 일이 흔치 않았다. 처음 극장에서 ‘땐뽀걸즈’를 봤을 때 그 공간에 있는 분들에게 지지받는 느낌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이고 그만큼 소중히 여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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