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죽일 놈의 발레

2017.10.20
셔터스톡
지난 6일, KBS가 ‘발레’를 주제로 한 추석 특집 예능 프로그램 ‘백조클럽’을 방영했다. 국립발레단 김지영 수석이 지도하는 발레 클래스에 배우 김성은, 방송인 서정희, 우주소녀 멤버 성소, 배우 오윤아, 배우 왕지원이 학생으로 출연했다. 같은 발레단 소속의 솔리스트 김기완이 서정희의 개인 레슨을 맡았고, 솔리스트 이영도는 손님에게 화려한 레오타드를 자꾸만 권하는 발레용품샵의 아르바이트생(?) 역할로 깜짝 등장했다. 다음 날인 토요일 오전, 서울 마포구의 한 발레학원. 사람들은 익숙한 포즈로 스트레칭을 하며 지난 밤 방영된 프로그램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그 프로그램 콘셉트가 ‘심야에 열리는 힐링 발레스쿨’이라면서요?” “하하하, 저처럼 킬링이나 안 하면 다행이죠!” 아픈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수업에 참석한 회원이 웃으며 말한다. 골반 부상으로 발레와 이별해야 했던 왕지원 씨의 아픔에 비할 순 없겠지만, 취미로 발레를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통증과 부상은 흔하다. 이들 대부분은 불편한 정장 차림으로 ‘예의’를 갖추고 책상에서 하루 종일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눈치껏’ 사무실을 빠져나온 직장인. 만원 지하철에 부대끼며 겨우 학원에 도착해서 허겁지겁 옷 갈아입기 바쁘니 저녁 식사는 언감생심이다. 수업 중 현기증을 느끼는 건 당연하고, 무리해서 동작을 해내다 피로를 감당하지 못한 관절이 이상 신호를 보내는 일도 잦다. 여유 있게 학원에 도착해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부드럽게 워밍업된 상태로 클래스에 들어가면 좋을 텐데 이게 말처럼 쉬운가.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 취미발레생의 소원은 백조가 되어보는 것도, 흰색 튜튜(발레용 스커트)를 입고 왕자에게 안기는 것도 아니다. ‘퇴근을 한 시간만 빨리 할 수 있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바람이다.

어쨌든 학원에 도착했으면 그래도 절반은 해낸 것이다. 하이힐을 막 벗어 빨개진 발끝을 겨우 주무르고 타이즈와 슈즈를 신는다. 스커트 끈을 등 뒤로 돌려 묶고 거울을 보고 숨을 크게 내쉰다. 마무리 못 한 업무가 머릿속에 남은 날에는 한숨이 나오고 가뿐하게 퇴근한 날에는 심호흡이 나온다. 숨을 끝까지 뱉어내고 횡격막을 꼭 닫아본다. ‘선생님이 엉덩이 자꾸 뒤로 빠지면 안 된다고 했는데….’ 꼬리뼈를 쏙 말아넣고 자세를 잡는다. 횡격막과 꼬리뼈라니, 발레를 시작하기 전에는 단 한 번도 의식할 일이 없었던 신체 부위다.

내 몸과 친해져 좋기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죽일 놈의 발레”는 요구사항이 너무 많다. 아니 세상에, 오른발을 들면 그만큼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자연스러운데 절대로 기울어지면 안 된단다. 한쪽 다리를 뒤로 들면 상체가 앞으로 숙여지는 게 당연한데 다리는 많이 들되 상체는 조금도 숙이지 말란다. 신나게 점프를 하려면 후-욱 하고 숨을 몰아쉬게 마련인데 몸은 띄워도 횡격막이 부풀면 안 된단다. 이 모든 걸 신경 쓰다 보면 절로 미간에 힘이 들어간다. 곧 선생님의 호령이 떨어진다. “여러분, 얼굴이 너무 무서워요! 좀 웃으면서 하세요!”

바 워크를 끝내고 이어지는 플랭크-레그 레이즈-크런치로 구성된 복근 운동 3종 세트 시간. 선생님이 숫자를 세기 시작하면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고, 다들 뜻 모를 괴성을 지른다. 수면 부족 상태에서 운동은 심혈관질환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는데,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자야 되는 게 아닐까? 질 좋은 단백질과 신선한 섬유질도 듬뿍 섭취하고 말이다. 친구들은 지금 야구중계 보면서 치맥을 한다는데, 우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발바닥에 쥐가 나는 것을 참아가며 쁠리에-를르베(무릎을 굽히는 동작과 다리를 쭉 뻗어 발가락만 딛고 서는 동작)를 스무 개씩 반복하고 있는 걸까?

“저는 발레를 몸이 아니라 마음 때문에 해요.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든지 간에 일단 클래스에 들어가면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나와 발레’밖에 안 남잖아요. 그게 너무 좋아요.” 한 수강생의 이 고백은 매우 감상적인 이야기 같지만 동시에 상당히 현실적이기도 하다. 선생님이 제시하는 동작들을 수행하려면 날마다 조금씩 바뀌는 복잡한 콤비네이션을 빠르게 외워내야 하기 때문이다. 부장님의 실적 압박이나 월세를 또 올리겠다는 건물주의 고약함 같은 건 생각할 틈이 없다. ‘앞으로 두 개 뒤로 두 개, 뒤로 두 개 앞으로 두 개 옆으로 세 개…’ 하면서 주문을 외듯 동작을 외운다. 그리고 기억이 날아가기 전에 이걸 머리에서 몸으로 옮긴다. 그야말로 이 세상에 ‘나와 발레’밖에 안 남는 순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한 뒤 방금 배운 그랑-제테(공중에서 다리를 앞뒤로 쫙 펼쳐 보이는 점프 동작)를 연습해보기도 한다. 그러고 있는 동안만큼은 ‘내일도 출근해야 함’을 잠시 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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