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무엇을 말하는 걸까

2017.10.26
* 구체적 스포일러는 피했으나 영화를 보신 분들이 읽는 것을 권합니다.


개봉 전 ‘마더!’는 분명히 ‘로즈마리의 아기’를 레퍼런스 한 영화로 대중에 알려졌다. 시놉시스나 예고편으로부터 디자인을 아예 똑같이 오마쥬한 포스터까지 모든 부분에서 그랬다. ‘마더!’의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를 예전부터 알고 있는 관객들은 그의 집요한 경악 폭격 장면들을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블랙 스완’이나 ‘노아’에서도 그랬고 해당 장르가 아닌 ‘레퀴엠’에서조차 애러노프스키가 관객들의 공포심을 연주하는 기법은 대단히 능란했다. ‘마더!’를 본 대부분의 관객은 거기에 낚여 극장을 향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로즈마리의 아기’같은 영화가 아니었다. 극의 초반, 행복한 어느 부부의 평화를 깨는 외부인들이라는 설정자체가 맥거핀이었고 영화는 장르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달려나갔다. 이 영화는 호러가 아니라 ‘종교적 고민을 예상하지 않았던 관객들에게 종교적 상징을 강제 주입하는 영화’ 그 자체였다.

성경을 한 번이라도 읽어 본, 혹은 다이제스트 된 상식이라도 가진 이라면 이 영화가 종교적 상징으로 가득 찬 영화라는 사실을 아주 쉽게 알 수 있다. 게다가 엔드 크레딧에서 드러나는 캐릭터의 이름은 기독교에서 유일신을 말하는 ‘Him'이라던가 카인과 아벨의 다른 호칭인 ‘Oldest Son’ ‘Younger Brother' 등 너무나 명백한 종교적 캐릭터로 무장하고 있다. 심지어 ’물의 심판‘과 ’불의 심판‘등 지극히 직설적인 성경적 세계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종교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된다. 감독이 ’대놓고 이렇다‘고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영화를 재미 없게 보는 방법은 드물다.

어떤 감독들은 상징을 숨겨 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찾게 만드는 것으로 창작의 보람을 찾는다. 대부분의 감독들이다. 어떤 연출자들은 뻔한 상징을 드러내며 자신이 이런 것도 할 줄 안다고 외치는데, 성과가 좋지 않은 감독들이다. 대런 애러노프스키쯤 되는 감독이라면 보통 캐릭터나 사건이 하나의 상징으로 끝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관객들의 취향과 욕망에 의해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마더!’는 기본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듯 성경을 바탕으로 작은 공간에서 거대한 서사를 펼치는 실험이다. ‘노아’의 정반대 작법이다. 하지만 이것은 창작자와 감상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선민과 우민에 대한 우화일 수도 있다. 과학적인 세계관에서의 지구와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인류에 대한 이야기일 지도 모른다. 간략하게 축약한 인류의 역사일 수도, 자끄 데리다의 이론에 입각해 남근 지배의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배재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 이가 바로 감독 대런 애러노프스키라는 부분이다.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지금쯤 만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를 보며 오가는 수많은 논쟁들과 관객들 개개인의 의문들이야말로 그가 원했던 것일 수도 있다. 대런 애러노프스키의 영화 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은 가장 덜 논쟁적인 영화였던 ‘블랙 스완’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다른 존재를 연기해야 하는 자가 스스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는 심플한 서사는 창작자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누구나 구상 해 봤음직한 소재다. 그것을 집요한 디테일과 화려한 표현법, 그리고 나탈리 포트만의 희생적 연기로 빚어낸 작품이 바로 ‘블랙 스완’이었다. 하지만 대런 애러노프스키는 거기서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작품 중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가장 실패한 작품은 ‘천년을 흐르는 사랑’과 ‘노아’였다. 두 작품 모두 종교적 서사로 현존하는 인간들의 관념에 접근한 작품들이었다. 애러노프스키는 다시 한 번 그 분야에 도전한 셈이다. 하지만 이번엔 ‘천년을 흐르는 사랑’처럼 로맨스라는 형식에 기대지도 않았고 ‘노아’처럼 정면돌파로 승부하지도 않았다. 장르 영화의 탈을 쓰고, 그런 영화를 예상하지 않았던 관객들을 한꺼번에 어디론가 몰고 가는 ‘피리부는 사나이’적 작법을 택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피리 소리가 그리 매력적이지 못했던 탓일까. 이탈하는 관객들이 많았다. 이것이 또 한 번의 실패라면 애러노프스키가 다음에 또 어떤 엄청난 걸 가지고 등장할 지 기대와 동시에 우려도 밀려온다.

마지막으로 고민되는 부분인 동시에 사실은 가장 크게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이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태도에 관한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끝까지 주인공 ‘Mother'는 무례한 이들로부터 모욕당하고, 끊임없이 학대당하고 고통받으며 비난까지 당한다. 마지막엔 모성을 강요당하고 숭고한 희생을 통해 다음 세상을 창조하는 ’영감의 원천‘으로만 남는다. 이것은 충분히 미소지니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서사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 해 보면 대부분의 관객들은 그러한 주인공의 고통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공감하게 된다는 사실에 이른다. 저렇게 고통받고, 착취당하며 결국 스스로의 선택이긴 했지만 파괴되는 주인공이 어떤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가? 혹시 ‘마더’는 남성성을 가졌고, 남성 대명사로 표현되는 신이라는 존재 ‘Him’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 무책임하게 창조하고 파괴하는 이 세상에서 희생당하는 존재는 사실 여성이라는 사실을 고발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것 역시 애러노프스키가 의도한 논쟁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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