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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후의 삶, 명함 없이 사는 법

2017.11.13
셔터스톡
입사를 간절히 바랐던 때가 무색하게 퇴사를 꿈꾸는 직장인들이 많아졌다. 직장 생활의 애환을 다룬 풍자 일러스트와 페이스북 페이지가 꽤 인기를 모았고, 비슷한 주제의 다큐멘터리도 전파를 탔다. 마치 ‘퇴사’라는 키워드 자체가 유행이 된 듯했다. 서점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직장 생활의 힘겨움과 퇴사를 주제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고 일부는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회사를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내게 큰 자극이 됐다.

회사를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처우가 좋지 못해서,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에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등 그 사유는 단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수십 가지가 될 수도 있다. 퇴사 후의 삶 역시 제각각이다. 지친 심신을 추스르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이들도 있고, 미뤘던 공부나 운동을 시작하는 이들도 있다. 딱히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직장인일 때보다 더욱 바쁘게 지내는 경우도 있다.

퇴사 후 나는 “명함 없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동네방네 떠들어댔다. 얼핏 보면 꽤 근사한 프로젝트 같지만, 실은 그냥 백수다. 하릴없는 백수라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사실 처음 만나는 이와 인사를 나눌 때 명함만큼 편리한 것이 없다. 작은 종이를 교환하며 “어느 회사의 아무개입니다”라고 말하면 끝이다. 일로 만난 이들 사이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따지고 보면 명함으로 통성명하고 산 시간이 그렇지 않은 세월보다 훨씬 짧은데, 낯선 이와 어떻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명함 없는 삶은 현재 내 상태를 설명하는 말이자 동시에 도전 과제가 됐다.

그렇게 소속도 직함도 없는 본격적인 백수의 삶이 시작됐다. 내가 ‘명함 없이’ 새로 사귄 이들은 수영장에서 만난 14살 위 언니와 4살 아래 동생이었다. 초반엔 서로 이름과 나이 정도만 알고 지냈는데, 수영이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가까워지기 충분했다. 명함이 없는 삶은 그저 나를 소개하는 도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김 주임도 박 대리도 최 과장도 아닌 그냥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회인의 기준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가 원하는게 무엇이고,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퇴사 후 처음 해외 여행을 떠났을 때, 출입국 카드 직업란에 돈은 못 벌어도 글은 쓰고 있으니 작가라 써야 할지, 그냥 백수라 해야 할지 고민했다. 빈 칸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 갈등하는 동안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취업준비생 시절 느꼈던 위축된 감정이 아니라 스스로를 원하는 대로 정의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심장이 요동쳤다.

백수가 된다는 것은 뒤따라올 현실을 생각한다면 용기 있는 결정이다. 출퇴근길 지옥철에서 벗어난 자유를 얻은 대신 줄어드는 통장 잔고를 보며 초조해하거나, 평일 낮에 영화관이나 카페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대신 가족들의 한심한 눈초리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월급에서 알아서 빠져나가던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 등을 따로 처리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기다리고 있다. 가끔 비자 발급 등 신원 보장이 필요한 경우, 어쩔 수 없이 이전 직장의 신분이라도 끌어다 써야 하는 달갑지 않은 순간도 있다. 또 오랜만에 만난 이들에게 “요즘 논다”고 밝히면 이어지는 각종 질문과 걱정, 잔소리 세례도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한다.

최근 유행한 퇴사 관련 서적이나 콘텐츠 대부분은 직장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그런 회사를 떠나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막상 백수가 됐을 때 맞닥트릴 현실과 고민에 대해선 좀처럼 언급하지 않는다. 마치 퇴사가 모든 스트레스의 해결책처럼 읽히지만, 어쩌면 또 다른 고민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단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후회하지 않는 이유는 앞으로 살아갈 긴 세월에 앞서 잠시 모든 것들을 멈추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다. 단 점점 빈약해지는 통장 잔고는 가급적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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