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음식을 요리하는 다섯 편의 영화

2017.11.16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요리와 음식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이고, 동시에 생의 즐거움이며, 인류가 만들어내는 수많은 문명과 문화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리고 오늘부터 21일까지 열리는 서울국제음식 영화제는 요리와 음식과 문화, 그리고 인생을 다룬 다양한 영화들을 상영한다. 그래서 요리와 음식과 밀접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음식 영화를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년 봄, 파리를 한 달 동안 여행하며 파리지앵의 삶을 맛보듯 지냈다.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오르세 미술관, 센강, 에펠보다 온전히 나의 시간으로 꾸며진 시간. 질 좋은 버터에 달콤하고 부드러운 햇완두콩을 버무려 3유로짜리 와인을 곁들인 늦은 아침을 준비하던 때. 매일 식료품점과 재래시장, 슈퍼마켓을 돌아다니며 장을 보고 요리하던 그 순간들. 영화 속 줄리아 차일드(메릴스트립)가 파리에서 시장을 둘러보며 행복해하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때의 마법 같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줄리 포웰(에이미 에덤스)은 줄리아 차일드의 책 속 524개의 요리를 365일 동안 만들며 블로그를 통해 기록했다. 이는 그녀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켰다. 줄리 포웰은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라고 말한다. 예측불허의 연속,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삶 속에서 요리보다 확실한 기쁨을 주는 행위를 찾기란 어렵다. 좋은 재료를 기본으로 포인트를 알아 요리를 한다면 보장되는 결과다. 갈색의 껍질로 노릇하게 구워진 가자미,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초콜릿 케이크, 치즈 소스 같은 노른자를 품은 수란, 입 안을 부드럽고 강렬하게 감싸는 비프 브루기뇽…. 나는 요리가 주는 즐거움을 믿는다. 요리로 얻는 희로애락은 진짜고, 적어도 줄리와 줄리아 그리고 나에게는 확실히 해당하는 이야기다. 그녀들과 나는 모두 요리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들을 경험했다. ‘요리’는 삶의 순간을 영화로 만든다. 그녀들처럼.
글. 이정희(라망 매거진 편집장)

3년 전부터 시작한 음식영화제 덕분에 음식을 테마로 한 영화들을 많이 본다. 스포츠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이 중요한 승부를 가리는 ‘빅매치’이고 음악 영화에서는 감동적인 ‘마지막 공연/연주’라면, 음식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한 상 가득 차려진 만찬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늦은 시각 음식 영화를 보게 보면 야식의 유혹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는 건 신과 가까워지는 일이다(To eat good food is to be close to God).” 1996년 캠벨 스코트, 스탠리 투치가 감독한 영화 ‘빅 나이트’에 나오는 명대사다. 이 작품은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온 두 형제가 이탈리아 식당을 운영하며 ‘전통 고수와 현실적 타협’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생은 손님들 취향에 맞춰 메뉴를 조정하고 싶어 하지만, 형은 식당이 파산 직전임에도 이탈리아 정통 요리를 고수한다. 영화 제목인 ‘빅 나이트’는 유명 가수를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하면 식당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 믿고 두 형제가 온 정성을 다해 벌이는 만찬의 밤을 의미한다. 결국 그 가수는 나타나지 않지만 그날 밤 형제는 이탈리아 요리를 통해 사람들에게 최고의 행복감을 선사한다. ‘빅 나이트’에 서빙되는 화려한 풀코스 요리도 우리 눈을 즐겁게 하지만, 형제가 주먹다짐 후 화해의 아침식사로 함께 먹는 소박한 이탈리아 오믈렛 ‘프라타타’도 눈여겨볼 만한 메뉴.
글. 정우정(음식영화제 집행위원장)

부관의 도톰한 토스트를 살짝 구워 베어 물며 이 영화를 떠올렸다. 영국의 요리사이자 푸드라이터 나이젤 슬레이터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책과 영화로 만들어진 작품, ‘Toast’. 사람의 미각은 결국 환경과 그에 따른 경험에서 학습된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무엇을 먹는지가 나를 표현하는 요소가 된다는 브리야 사바랭의 이야기처럼. 하지만 나이젤 슬레이터의 유년시절은 요리에는 감각이 없는 병약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선한 채소나 고기, 과일들보다는 통조림으로 가공된 햄과 고기 등의 제품들로 만들어진, 그 역시 엄청나게 맛없는 요리로 채워진다. 그를 대체하여 주로 먹게 되던 바삭하게 구운 토스트. 버터를 담뿍 발라 베어 무는 그 느낌과 소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허기지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죽음 후 홀로 집을 나와 ‘Savoy Hotel’에서 허드렛일부터 하며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기까지 가정부로 분한 헬레나 본햄 카터의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은 충분히 유혹적인 볼거리이지만, 내게 가장 긴 여운을 가져다 준 것은 바로 토스트. 이 영화에서 표현되는 ‘토스트’는 삶을 영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어머니를 떠올리는 그리움에 더 가깝다. 다가오는 운명을 극복하고 주도적으로 자신을 이끌어낸 나이젤의 이야기. 가끔 스스로 나약해지고 마음이 스산해질 때 떠올리게 된다.
글. 김혜준(제과제빵학과 교수 출신. 푸드 콘텐츠를 기획하는 ‘김혜준 컴퍼니’ 운영 중)

아침밥을 잘 챙겨 먹어야 오히려 살이 빠진다는 그 말을 믿지 않는 편이지만, 아침밥을 먹는 일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는 경험적으로 안다.  ‘안경’ 속 하마다 게스트하우스의 사람들이 매일 아침 먹던 찐 야채, 달걀프라이, 연어구이, 우메보시, 미소된장국, 흰쌀밥을 보다가 홀린 듯 아침 식사를 챙겨 먹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 속 타에코처럼 늘 쏟아지는 빛에 눈을 뜨는 일상은 아니었지만 시커먼 겨울 아침에도, 숙취에 온몸이 쭈그러든 아침에도 일어나 밥상을 차렸다. 글쎄, 그게 정말 하루를 바꾼다. TV를 켜지도 않고 차려놓은 밥상만을 마주본 채 수행하는 이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인생의 템포를 바꾼다. 와르르 쏟아지는 인생에서 그나마 나를 가다듬을 수 있는 보호막 같은 시간. 게다가 최근, 아침을 챙겨 먹지 못한 채로 일에 허덕이며 살다보니 작고 간단한 아침 식사의 고마움을 더 확실히 깨닫는 중이다. 이 원고를 쓰기 위해 오랜만에 ‘안경’을 보며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좀 일찍 일어나 셰프가 만든 식빵으로 장안의 화제가 된 가게의 식빵 한 덩이를 스윽 잘라 굽고, 지인이 선물해준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얇게 펴 발랐다. 베이컨을 굽고 그 기름에 달걀 프라이도 했다. 고향에서 보내준 단감도 좀 깎았다. 한 접시에 와르르 올리지 않고 하마다 부엌에서 하듯이 작은 접시 여러 개에 나눠서 올렸다. 내침 김에 메르시 체조까지 해볼까 하다가 시계를 보고 참았다.
글. 손기은( 매거진 ‘GQ’ 피처 에디터)

‘음식남녀’의 오프닝에 홀리지 않는 사람은 본 적 없다. 펄펄 뛰는 팔뚝만한 생선의 포를 떠서 밀가루를 입혀 튀기고, 말끔히 손질한 오징어에 섬세하게 칼집을 넣고, 바싹 튀긴 돼지고기를 기름에서 건지자마자 얼음물에 담가 식힌다. 칼날의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야채를 썰고, 만두피까지 직접 밀어 게살 만두를 빚는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게 가정 요리이다. 명절이나 잔치도 아니고 눈물의 가족 상봉도 아니다. 한 집에 사는 아버지와 딸 셋의 일요일 한 끼를 위한 것이고, 다음 일요일에도, 다다음 일요일에도 다른 요리들이 같은 규모로 차려진다. 도대체 왜 집에 북경오리용 화덕이 있고, 어쩌자고 식구들끼리 먹는 동과 껍질에 조각을 하는가. 아버지 주 사부는 유명 호텔 총주방장 출신이다. 미각을 잃고 은퇴했지만 지금도 유사시에는 불려가는 대 요리사를 두고 딸들이 부엌에 설 일은 없다. 교사인 맏딸 가진, 항공사 중역인 둘째 가천, 아직 학생인 막내 가령의 역할은 먹고 불평하는 것이 전부이고 가끔 뒷정리를 거들 뿐이다.
아내이자 어머니의 사망 후 가족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한 지붕 아래에서도 독립적으로 생활한지 벌써 16년이다. 일요 만찬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을 묶어주는 유일한 시간임을 딸들도 알기에 불만은 많아도 꼬박꼬박 참석한다. 하지만 만찬은 가족을 갈라놓는 시간이기도 하다. 임신이니 동거니 하는 소리를 왜 굳이 밥상머리에서 하나 싶지만, 다들 모이는 게 그 때뿐인데 어쩌겠는가. 참신한 것은 가족이 다시 음식을 통해 봉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원하게 해체되는데,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드는 게 그 부분이다. 요리와 인생은 다르고, 가족은 각자의 인생을 사는 개인인 것이다. 
물론 이 영화의 가장 특별한 점은 음식이다. 일요 만찬 말고도 푸드 포르노가 가득한데 하나만 꼽는다면 주 사부가 이웃집 꼬맹이 산산을 위해 만든 도시락이다. 시간이 없어서 몇 가지 간단한 요리만 싸왔다는 말과 함께 줄줄이 나오는 무석갈비, 게살야채볶음, 청두새우, 여주 갈비탕... 산산은 친구들에게 선주문까지 받으며 위세를 높이는데 행여 계란볶음밥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할아버지는 쉬운 요린 안 하신다며 거들먹거리는 꼴을 봐야 한다. 눈꼴시지만 어쩌겠는가. 주 사부의 도시락을 얻어먹을 수 있다면 나라도 영혼을 팔 것이다.
글. 정은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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