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This is it

레드벨벳, 벨벳 애티튜드

2017.11.22
걸그룹 레드벨벳의 신곡 ‘피카부(Pee-A-Boo)’에서, 그들은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랑에 대한 태도를 묘사한다. ‘새것만 좋아하는’ 그들에게 사랑은 ‘설렐 때만’이고, 그래서 상대에게는 ‘중간에 내 맘 변해도 놀라지 말기’라고 말한다. ‘피카부’의 뮤직비디오에서 ‘설렐 때만 사랑’에 맞춰 보여주는 영상은 예리가 남자 피자 배달부에게 피자를 받는 것이다. 아직 식지 않은 피자. 그들에게 사랑, 또는 남자는 그 정도 의미다. 그들이 사랑으로부터 원하는 것은 ‘지루해질 틈’조차 없이 ‘저 달이 정글짐에 걸릴 시간까지 노는’ 것 뿐이다. 그러자 친구들이 모두 소리친다. ‘넌 정말 문제야!’ 왜 문제인지는 정확히 묘사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한국의 걸그룹 중 가장 인기 있는 팀은 하루 종일 남자가 자기를 좋아해주는 상상만 하는 가사를 계속 반복하는 트와이스다. 그런데 걸그룹이 남자를 기다리거나, 유혹하거나, 매달리는 대신 먹다 남길 피자 정도로 의미를 둔다.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문제적’인 것은 분명하다.

사랑에 금세 빠질 수도 있고, 싫증날 수도 있다. 피자를 배달시켜 먹으면서 그 피자 위에 보석을 뿌리고 놀 만큼 세속적인 가치관과도 동떨어져 있다. 이 여자는 ‘청순’이나 ‘섹시’ 같은 한 단어로만 설명할 수 없다. 당연히,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스스로를 이해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피카부’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사람들은 카메라를 따라 레드벨벳의 집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레드벨벳은 방문자에게 어떤 어필도 하지 않는다. 당연히 아무리 뮤직비디오를 본다 해도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대신 ‘피카부’의 의미를 해석할수록 이 여자들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될 뿐이다.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통제할 수도, 그런 자신을 타인에게 설명하고자 하지도 않는 여자. 하지만 이 여자의 예측 불가능하며 매력적인 행동은 방문자에게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과거의 어떤 남자들은 이런 여자를 마녀로, 또는 악녀로 불렀다. ‘피카부’의 뮤직비디오가 호러영화의 스타일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이것은 걸그룹의 자리에 마녀를 부른 것이므로.

사랑이 피자나 정글짐 같은 즐거움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는 여자. 누군가는 문제일 뿐이라고 하겠지만, ‘여우’임을 자처하며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하는 여자. 이런 여자가 자신의 머릿속 세계를 열어 자신을 이해해보라고 한다. 걸그룹이 현실에 존재하지만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 여자를 표현했다. ‘피카부’의 뮤직비디오에서 레드벨벳의 네 멤버가 조이를 둘러싸고 도는 영상은 곧 조이의 자리에 피자 배달부가 있는 것으로 바뀐다. 구경의 대상으로 소비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걸그룹 중 하나가 위치를 바꿔 자신들을 이해해볼 것을 요구한다. 한국의 걸그룹이 조금 더 다양하게 존재하는 여자,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방법을 찾았다.

‘피카부’의 곡과 퍼포먼스가 모두 애쓰지 않는 태도를 가진 것은 정말 중요하다. ‘피카부’의 보컬과 편곡은 좀처럼 감정을 밝고 활기차게 끌어올리지 않는다. 점점 더 빨라지는 리듬은 신나지만, 보컬은 음을 끌어올리며 분위기를 띄우거나 하지 않고, 후렴구는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짧게 끊는 리듬으로 구성된 몇 개의 멜로디를 반복하는 것이 전부다. 아이돌 그룹의 필수요소처럼 들어가는 후반부의 애드립 역시 다른 소리 사이에 감춰지거나, 음을 높이고 늘리는 대신 살짝 짚고 가는 정도다. 보컬 톤만 가볍게 하면서 밝은 느낌을 살짝 불어넣는 정도다. 레드벨벳은 이 곡에 맞춰 손을 허리에 얹고 골반을 튕기거나, 귀엽게 팔을 펴는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많은 걸그룹들이 그들을 귀엽거나 섹시하게 보이게 하는 동작들이다. 그러나 이 동작들 사이에 손을 망원경처럼 만들어 눈에 갖다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동작이 들어가기도 하고, 멤버들의 표정은 좀처럼 활짝 웃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동작들은 곡의 비트에 맞춰 약간은 딱딱하게, 동작과 동작 사이가 단절된 채 진행된다. 트와이스가 내 마음을 알아달라며 끊임없이 미소와 작고 앙증맞은 동작을 취한다면, 여자친구는 ‘유리구슬’과 ‘오늘부터 우리는’에서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창했다. 하지만 레드벨벳은 열심히 웃으며 마음을 전달하지 않는다. 사랑이 정글짐 정도의 재미를 준다고 생각하는 딱 그만큼의 표정과 동작. 레드벨벳의 소속사 SM 엔터테인먼트는 좀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여자의 캐릭터를 티징부터 퍼포먼스까지 근래 가장 일관성 있는 결과물을 통해 설득해냈다. 복잡한 캐릭터에 대해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는 비주얼 디렉터와 작사가, A&R을 동시에 가진 회사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걸그룹이 사랑받기 위해 애교를 부리지 않는다. 귀엽거나 섹시하게 보이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상업적으로 위험한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레드벨벳은 아이린이 종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잘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조이는 JTBC ‘아는 형님’에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일에 대한 부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들은 ‘피카부’ 이전부터 스스로 한국에서 걸그룹에게 요구하는 규범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었다. ‘피카부’는 이런 면모를, 마치 아이린의 캐릭터를 무대 위에서 표현한 것과 같다. 그리고 매혹적인 순간이 펼쳐진다. 무조건 활짝 웃거나 애교를 부리는 대신 멤버에 따라, 또는 가사에 따라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면서 레드벨벳의 멤버들은 그들이 얼마나 다양한 매력을 표현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피카부’의 엔딩에서 클로즈업되는 아이린의 표정은 일반적인 걸그룹의 곡에서는 나올 수 없다. 조이가 짧은 원피스를 입고 웨이브를 출 때의 묘한 분위기를 단지 섹시하다는 표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사랑받기 위해 애쓰지 않는 태도가 오히려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의 다양한 모습을 보게 한다. 이런 태도가 모두에게 사랑받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매력일 수도 있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여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타인에게 노출해야 하는 모습 대신 자신이 보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피카부’는 레드벨벳의 잊혀지다시피 했던 ‘벨벳’ 콘셉트를 재정의하면서, 그들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규정했다. 물론 ‘피카부’와 ‘벨벳’이 그들의 유일한 노선이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피카부’에서 갖게 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순간도 올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한 가지 기대만큼은 할 수 있게 됐다. 완벽한 벨벳으로 돌아올 때, 그들은 마녀가 될 것이다.

글. 강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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