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의 여성캐릭터│② 레드벨벳부터 ‘며느라기’ 민사린까지, 2017년의 여성 캐릭터들

2017.12.05
2017년, 이전과 다른 목소리로 세상을 이야기한 여성 캐릭터들 아홉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문소리, ‘문소리’를 말하다

영화감독이자 배우 문소리는 ‘여배우는 오늘도’를 연출하며 열 번에 이르는 시나리오 수정을 통해 “엄마이자 딸이자 아내이자 며느리이자 여배우”인 자신의 삶을 반영해 요즘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묘사했다. 특수한 직업군에 속한 여성이자, 중년에 가까워진 여성 배우로서 겪는 어려움을 “패러디”하듯 풀어내는 것은 유쾌한 풍자이기도 했지만, 이 과정을 통해 남성 배우들 중심으로 짜인 영화 산업 구조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특히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는 ‘문소리’의 모습은 소위 ‘워킹맘’의 어깨에 커다란 부담이 얹혀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한국 영화에서 보기 힘든 낯선 여자 주인공의 얼굴이었다. 많은 이들이 선망하는 ‘여배우’가 앵글 뒤에서 얼마나 평범한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살고 있는지 보여준, 최초의 캐릭터였던 것. 문소리가 자신의 직업과 생활상을 통해 만들어낸 ‘문소리’는 챙겨야 할 일도, 챙겨야 할 사람도 많은 대한민국 여성들의 현재이자, 가까운 미래였다. 쓸쓸한 아버지의 애환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KBS ‘아버지가 이상해’ 변혜영, 평범하지 않은 가족의 수호자

‘아버지가 이상해’ 속 변혜영은 가족 관계에서조차 개인적인 공간을 넘보면 가차 없이 반칙을 선언하는 여성이고, 남편 차정환(류수영)에게는 ‘결혼 인턴제’를 제안해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부적격자’가 되어 탈락할 수도 있게 만들었다. 주변에 있는 대다수의 인물들이 이런 변혜영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했다. 하지만 아버지 변한수(김영철)를 위협하는 기자의 행동을 조리 있게 반박할 수 있었던 것은 변혜영뿐이었다.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 비난받기도 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역할을 해내는 여성 캐릭터는 감상에 젖어 절절 매는 가족들 앞에서 모든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간다. 이 드라마의 행복한 결말 역시 변혜영이 변한수의 무죄를 입증해줄 사람을 꼼꼼히 찾아내 법정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매사에 사사건건 참견하지 않고도, 종종 서로의 의견을 경청해 논리적 접점을 찾는 것만으로도 건강한 가족 관계가 완성된다. 마치 기존의 가족 제도에 반기를 들고 모든 전통을 해체하는 것처럼 보였던 변혜영이었지만, 그는 사실 가장 강력한 세대 간의 결속을 가능케 했던 인물이었다.

tvN ‘비밀의 숲’ 한여진,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일

“처음에는 민폐형 같기도 하고,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캐릭터이기도 했다.”(‘연합뉴스’)는 인터뷰 내용처럼 ‘비밀의 숲’의 형사 한여진 역할을 맡은 배두나는 처음에 이 역할에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살짝 다듬었는데 좋아졌”다는 대본을 보고 “내가 이 역할을 하면 민폐스럽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며 수락했다. 많은 한국 드라마에서는 스릴러, 로맨틱 코미디 등 특정 장르를 불문하고 전문직을 다룬 대다수의 작품 속 여성을 남성 주인공의 손길이 필요한 모자란 존재로 묘사하곤 했다. 반면 한여진은 오히려 황시목(조승우)의 단점을 비판하고, 무심코 본심을 드러낸 그를 보며 여유롭게 웃는다. 그렇기 때문에 특검에서 그가 황시목의 지시를 받는 것은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검찰과 경찰 사이의 특수한 상하 구도를 반영한 미묘한 특검 조합으로서 이해될 수 있었다. 여성 캐릭터에 똑 부러지고 명쾌한 역할이 부여된 것만으로도 드라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더욱 뚜렷해졌다. “내가 이 역할을 하면”이라던 배두나의 자신감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아이 캔 스피크’ 나옥분의 연설, 나문희의 수상 소감

CJ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공모전’ 당시, “‘아이 캔 스피크’의 한 줄 태그는 ‘우리 동네 민원 여왕 나옥분, 미 의회에 민원을 제기하다’”(‘한국영화’)였다. 실제로 ‘아이 캔 스피크’ 속 나옥분은 전형적인 할머니 캐릭터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저기 간섭하며 타인을 귀찮게 하고, 매번 쓸데없이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나옥분이 그토록 주변인들을 귀찮게 하는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박민재(이제훈)는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지 않았을 것이고, 일본군 위안부로서 상처받은 어린 시절에 관해 털어놓을 방도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쓸쓸함과 외로운 정서 또한 매사에 집요하게 시장 상인들을 챙겼기 때문에 더욱 부각됐다. 목소리를 높여가며 얘기하고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할머니들 중 안타까운 서사를 묻어둔 여성이 어디 나옥분뿐이겠는가. 올해 ‘청룡영화상’에서 나옥분 역할을 맡았던 나문희는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그는 수상 소감에서 “나의 친구 할머니들”이라는 말을 했다. 위안부이자 동시에 할머니의 이야기가 그들 세대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된 순간이었다.

‘가시나’ 선미, 가차 없이 서늘하다

선미는 ‘가시나’에서 자신을 ‘꽃’으로 묘사하면서 턱에 손을 대고 발랄한 손동작을 하다, 순식간에 표정을 굳히고 총을 쏘는 동작을 취한다. 힘을 안 주다 못해 거의 뺀 것에 가깝게 움직이는 손가락은 굳이 떠나간 것에 에너지를 쓸 필요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다. 자신을 버리고 간 남성이 원망스럽지만, 거기에 매달리기보다는 ‘너는 졌고 나는 폈’다는 가사로 깔끔하게 관계 종료를 선언하는 선미는 어찌나 서늘한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선미가 무대 위에서 그려내는 ‘가시나’는 은연중에 한국 사회에서 남성을 기다리거나 애타하지 않는 여성을 가리키는 몇 가지 비속어를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이조차 의도한 것일까. 선미는 마지막 방송 비하인드 영상에서 어반자카파 조현아에게 선물받은 꽃을 귀에 꼽고 “이렇게 하고 (무대에) 갈까? 그럼 콘셉트에 부합되잖아.”라고 말한다. 이별 노래를 부르면서도 꽃송이를 머리에 올리고 더 아름다워졌다고 말하는 여성. ‘가시나’의 주인공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원더우먼’, 21년의 기다림으로 얻은 수확

영화 ‘원더우먼’ 속 원더우먼, 다이애나(갤 가돗)는 아마존의 전사로, 자신이 살던 데미스키라에서 벗어나 세계를 구하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다이애나는 인간 세계에 온 뒤로 회의장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쫓겨나고, 수많은 군인들이 여성인 그를 보며 “정체가 뭐냐”고 의심하는 상황을 겪는다. 다이애나의 앞에 놓인 수많은 장애물 중, 여러 차례 발목을 잡는 것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이었다. 그가 전장의 영웅이 되기까지 남성의 ‘비밀 비서’로 위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유머러스하게 그려졌지만 씁쓸함을 남긴 이유다. 하지만 원더우먼은 결국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다.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을 곱씹으면서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살아간다. ‘원더우먼’은 여성으로서 자신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살아가는 여성의 이야기였다.

웹툰 ‘며느라기’ 민사린, 한 여성의 자존감 찾기

웹툰 ‘며느라기’의 민사린은 회사에서 인정받는 유능한 여성이다. 그는 결혼 전만 해도 자신이 시댁 식구들의 말 한마디에 기분이 상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시댁 행사와 역지사지가 안 되는 시누이, 가끔씩 자신을 ‘도와주는’ 남편 사이에서 스스로의 가치가 절하되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결혼한 여성들은 ‘며느라기(期)’를 거부하지 못한다. 또한 결혼이란 상대의 가족과도 연을 맺는다는 약속이기에 그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욕망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민사린이라는 캐릭터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관계 속에서, 남자들이 남긴 과일을 “먹어 치우”고 커다란 남자들의 잔칫상 옆에서 “편하게” 작은 상을 놓고 밥을 먹는 행위가 왜 자신의 몫이어야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고 불평등한 요구에도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는 스스로를 자각한 순간, 드디어 민사린은 변화의 문턱에 들어선다. “민사린, 왜 웃고 있어?” 대부분의 며느리들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피카부’ 레드벨벳, 호러 무비의 주인공들

‘피카부’ 뮤직비디오 속 레드벨벳은 오프닝부터 총을 들고 문 앞에 서 있다. 영화 ‘스위니 토드’의 한 장면을 재연한 것처럼 면도칼과 가느다란 핏줄기를 보여주고, 피자 배달부인 남성을 유혹한 뒤 자기들끼리 도끼를 던지고 춤을 추며 놀기도 한다. 남자는 소녀들 사이에서 허둥지둥 도망치지만,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미 그의 목숨은 총을 쏠지 말지 결정할 다섯 여성의 몫이기 때문이다. 레드벨벳은 무대 위에서도 화려한 옷을 입고 무감각한 얼굴을 한 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애교스러운 표정을 보여주거나 간혹 웃음을 짓다가도 후렴에 이르면 예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온다. ‘피카부’, 즉 사랑 앞에서 ‘까꿍’이라는 태도가 전부인 걸그룹은 낯설다. 그러나 을씨년스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다섯 명의 여성은 그렇기 때문에 새롭고 짜릿한 쾌감을 준다. 어떤 표정을 짓든, 어떤 사람을 좋아하든, 좋아하다 싫어하게 되든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10대 여성 베스트셀러 1위(YES24 기준)가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저)이고, 5위가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저)인 시대이니 놀라울 것도 없다.

영화 ‘박열’ 가네코 후미코, 여성 운동가의 삶

영화 ‘박열’에서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한 최희서는 지난 10월 열린 ‘대종상’ 시상식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역사 교과서에 실릴 만한 훌륭한 업적을 남기진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치열했던 권력에 맞서 투쟁했던 아름다운 과정이 영화에 담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열과 ‘함께’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네코 후미코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가네코 후미코는 마치 박열의 조력자처럼만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크든 작든 업적을 남긴 여성이 남자 주인공의 이름을 딴 영화에서 재현될 때 갖는 한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이런 캐릭터가 중년 남성에 편재된 한국 영화 시장에 등장한 것만으로도, 여성들이 맡는 캐릭터의 범위가 점차 확장되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가네코 후미코’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나기 힘들 거라는 생각으로 촬영했다”는 최희서의 말이 인상적인 이유다. 앞으로 여성 배우와 여성 캐릭터들은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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