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먼스플레인

나의 1980년대

2018.01.15
영화 ‘1987’을 보았다. 당시 상황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광화문 주변 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전교생이 ‘태극기 부대’로 동원되는 것에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은 고교 시절을 보냈다. 그런 새내기가 대학에서 새롭게 알게 된 우리 사회의 현실들은 사실 그 자체로 충격적이었다. 또 그러한 사실이 왜 우리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았는가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배경을 알고 싶었고 진실을 공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소위 운동권 학생이 된 이유다.

나의 대학 시절은 전두환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들던 때로, 경찰이 학내에서 막 철수한 시점이다. 짭새(사복경찰)가 학내에 상주하던 시기의 학생운동은 구호를 외치는 순간 불과 몇 분 만에 바로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선배들은 ‘군부 독재 타도’라는 여섯 글자를 외칠 수 있는 물리적 시간을 위해 건물 위에 줄을 매달고 그 줄에 몸을 의지한 채 시간을 벌었다고 한다. 창문을 통하든 줄을 당겨 올리든 검거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는 긴급조치 운운하며 아예 탱크가 대학에 상주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래서 선배들은 우리에게 정말 ‘복 받은 세대’라고 하였다. 복 받은 세대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세대라는 의미다. 우리는 형식적이나마 대학 교문을 경계로 하여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받았다. 사회과학 세미나를 하였다. 광주민주항쟁 사진전을 보았다. 수많은 연대 사안에 대응하였다. 알고 있던 모든 사실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우리가 믿고 있던 모든 것에 질문을 하였다. 밤을 새워 대학생의 사회적 책무를 고민하고 토론하였다.

1987년 이전에는 사회운동 단위가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학생운동이 사회운동의 흐름을 주도하였던 시기이다. 학생운동 안에서는 군부독재 타도에 대한 메시지를 시민들에게도 널리 알려야 한다는 책무감이 있었다. 가두시위와 가가호호 유인물 배포에 많은 학생이 참여하였다. 삐삐도 프린터도 제대로 없던 시절이니 만나서 장소와 시간을 듣고 작은 쪽지에 일일이 손으로 그린 지도를 공유하며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두시위 직전 정보를 받고 출동한 사복경찰과 마주쳐 신경전을 벌일 때마다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구호가 빨리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거리에서는 영화에서처럼 두드려 맞고 쫓기고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서로의 손발을 묶어 도로에 눕는 액션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밤에는 시민홍보 차원에서 유인물 배포 작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가가호호를 뛰어다니며 우편함에 유인물을 꽂았다. 보통 밤 10시 이후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밤사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주민들의 소식이 들릴 때면 얼마나 보람을 느꼈는지 모른다. 그만큼 잡혀간 친구들의 소식도 많았다.

이처럼 많은 여학생들이 다양한 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처럼 여성폭력 사안에만 나선 것이 아니라 민주와 정의를 외치는 역사의 현장 모두에서 함께 자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누군가는 투쟁위원장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는 유인물 필자, 대자보 기록자가 되기도 하였다. 대학생 약 1300명이 구속된 86년 건국대, 예상치 못한 나흘간 고립 상황에서 여학생들이 쿠션 솜을 이용해 생리대를 생산하고 서로에게 나누어 주었던 기억은 잊을 수 없다.

여학생들은 운동권 내의 남성 중심 문화를 비판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총여학생회, 여학생대표자협의회 등을 만들어 학생운동뿐 아니라 학내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적 행위 일체를 개선하기 위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당시 여성주의를 표방하고 창간된 고대여성교지 ‘석순(石筍)’은 여학생운동 전반에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1987’을 보면서 그때의 생각이 들었고, 어떤 상업영화보다 더 많은 운동권 여학생의 모습이 주체로 재현되었다고 본다. 여주인공 캐릭터는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있지만, 독재 타도와 직선제 쟁취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였던 여성들의 모습이 사실에 가깝게 재현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여학생들의 참여가 존재하였다는 것과, 그렇게 많았던 운동권 여학생들이 사회에서 어떻게 배제되어 갔는지를 돌아보아야 할 사회적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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