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여성들│① ‘워맨스’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2018.01.16
지난해 12월 15일, 배우 겸 모델 이호정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불야성 1주년”이라는 말과 함께 이요원, 유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게시했다. 세 사람은 모두 MBC ‘불야성’에 출연했던 여성 배우들이다. 언뜻 보면 같은 드라마를 찍었던 배우들끼리 꾸린 친목 모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극 중 서이경(이요원)과 이세진(유이)의 관계는 ‘워맨스(워먼과 로맨스의 합성어)’라는 말을 탄생시켰을 정도로 화제가 됐다. 이세진과 마리(이호정)의 관계도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바탕으로 은연중에 가까워지는 러브 스토리의 공식을 닮았다. ‘브로맨스’라는 단어가 남성 주인공들 위주의 작품 속에서 나타난 그들만의 케미스트리를 설명하는 단어였다면, ‘워맨스’는 그 자리에 여성들을 위치시켰다.

MBC ‘불야성’ 이후, SBS ‘수상한 파트너’, JTBC ‘품위 있는 그녀’, tvN ‘부암동 복수자들’, KBS ‘흑기사’ 등에 이르기까지 여성 캐릭터들 간의 관계성이 남성 캐릭터와의 로맨스 이상으로 두드러지는 드라마가 방송사별로 한두 편씩 꾸준히 등장했다. 드라마 속에서 제시하는 상황도 다양했다. ‘불야성’이 정재계 인사들끼리의 권력 다툼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여성들이 야망을 실현하고자 벌인 게임이었다면, ‘수상한 파트너’는 법조계에서 서로의 능력과 외모에 반한 여성들끼리 시원하게 칭찬을 늘어놓으며 서로를 인정해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품위 있는 그녀’와 ‘부암동 복수자들’에서는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인 시스템에 순종해 살아가던 여성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찾아 나선다. 가장 최근작인 ‘흑기사’는 전생에서 현생으로 이어지는 권선징악의 동화처럼 느껴지는데, 이 복잡한 구조 안에서 모든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사람은 정해라(신세경), 샤론(서지혜), 장백희(장미희)라는 세 명의 여성이다.

남자 주인공들은 이들끼리 만들어내는 케미스트리 바깥에 있다. 실제로 지창욱의 첫 로맨틱 코미디로 주목받은 ‘수상한 파트너’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드라마에서 남성 주인공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불야성’의 박건우(진구)는 자신만의 신념과 재능을 지닌 멋진 재벌 남성이다. 그러나 서이경과 이세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아슬아슬하고 긴박감 넘치는 권력 다툼 안에서 그는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과거의 연인이나 질투의 매개자 정도에 머무른다. 심지어 ‘부암동 복수자들’과 ‘품위 있는 그녀’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부자인 아버지나 불륜 상대에게 휘둘려 줏대라고는 없는 한심한 인물로 그려진다. 또한 극 중에서 문제를 만들어내는 인물은 대부분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이거나 결혼이라는 제도를 거부할 용기를 갖추지 못한 남성들이다. ‘흑기사’에서 어린 시절부터 분이(신세경)를 사랑했던 이명수(김래원)는 서린(서지혜)과 결혼을 하고 나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이것이 문제의 불씨가 된다. ‘품위 있는 그녀’에서 안재석(정상훈)은 불륜을 저지르면서도 우아진(김희선)에게 결혼 관계를 유지하자고 떼쓴다. 최근 드라마 시장의 경향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작품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게 사실이지만, 소수의 작품에 그치는 만큼 여성들의 입장과 시선이 더욱 강조되는 효과가 있다. 드라마에서 묘사됐던 남성 캐릭터들이 지닌 무기력함이나 뻔뻔한 태도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이 여성들에게는 장점만큼이나 단점도 많다. 주역들의 성별이 바뀌었다고 해서 드라마의 설정까지 변화했다고도 보기 어렵다. 물론 가부장제나 정재계에서 외면받던 여성들이 권력의 주체로 나오는 모습은 여성 캐릭터들이 작품의 전면에 부각될 때라야 가능한 설정이다. 하지만 드라마 속 여성 주인공들끼리 맺는 관계에서 소위 ‘갑’과 ‘을’의 모습은 성별 역전이 일어나기 전에 남성 캐릭터들이 갖고 있던 단점과 흡사하다. ‘불야성’에서 서이경은 “한 번 탐낸 건 절대 놓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는 거부감을 갖는 이세진에게 온갖 불행한 상황을 유도해 결국 자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기존의 남녀 로맨스로 바꾸면, 서이경은 자신의 재력과 야망을 바탕으로 여성 주인공을 손아귀에 넣는 전형적인 남성용 악역 캐릭터다. 박건우가 온건한 방식으로 개혁을 도모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불야성’을 성별과 관계없이 악한 인물을 뉘우치게 만드는 정직하고 선량한 주연 남성의 이야기라고 바라볼 수도 있게 된다. ‘흑기사’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못된 짓을 저지르는 샤론을 혼내는 장백희도 과거에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저주에 묶인 사람이다.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인물이 되었지만, 사실은 가부장제에 저항하지 못하고 타인에 대한 질투와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한 악역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이들이 맺는 관계를 다르게 바라봐야 할 이유가 생긴다. 서로가 서로의 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라온 환경은 달라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이가 된다. ‘품위 있는 그녀’ 속 우아진(김희선)과 박복자(김선아)는 같은 여성끼리만 느낄 수 있는 동경의 시선을 바탕으로, 남성의 재력에 의존해서 만들어진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한탄하며 느끼는 자괴감을 무의식적으로 공유한다. 또 ‘수상한 파트너’에서 노지욱(지창욱)을 동시에 좋아한 은봉희(남지현)와 차유정(나라)은 “왜 하필 당신이냐.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하필 예뻐서 더 짜증난다”며 서로 질투를 가장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흑기사’에서도 장백희는 남자를 뺏겠다고 철없이 나서는 샤론의 앞날을 걱정하고 혼내면서도, 마치 부모이자 친한 언니처럼 매사에 그를 감싼다. 이처럼 성별 전복이 어렵지 않게 가능한 서사와, 필연적으로 남성이 낄 수밖에 없는 관계에서도 여성들끼리 만들어가는 친밀한 관계성은 “여자의 적은 여자” 같은 말을 더 이상 농담으로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야기한다.

얼마 전, 려원은 ‘2017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마녀의 법정’과 관련해 성폭행 처벌 수위에 대한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꺼냈다. 홍은희는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서 “여성으로 살아온 내 기억 곳곳에 있는 피해의 순간들을 떠올리게 했”다며 “김지영 씨에게 편지도 썼다. 전해줄 수는 없지만 그냥 동생 같아서(‘여성중앙’)”라고 말했다. 그리고 김선아는 ‘품위 있는 그녀’ 종영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가부장제의 또 다른 희생양이었던 청소년 안운규(이건우)를 언급하며 “태생은 다르지만 운규도 자신의 환경 속에서 혼자였다. 또 다른 복자 같은, 외로운 아이였다”(‘TV리포트’)고 박복자와 안운규의 불행을 주류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의 외로움으로 바라보기까지 했다. 여성주의 이슈의 대두와 함께 여성들끼리 공유하는 가치관도 변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산업의 주요 소비자인 그들의 영향력이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필연적이다. 하지만 실제로 변화를 끌어내고 있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일을 해온 여성 배우들인지도 모른다. 드라마를 만들어가는 주역들의 가치관이 변해가고 있기에, 거기에 응답하는 작품도 나온다. 그 의미는 ‘워맨스’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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