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의 여성들│② ‘품위 있는 그녀’ 부터 ‘흑기사’까지, 여성들의 케미스트리

2018.01.16
2017년부터 2018년 초입까지 지상파와 케이블, 종편 할 것 없이 여성 캐릭터들끼리의 관계가 도드라지는 작품을 한두 개씩 내놓았다. 또한 MBC ‘불야성’은 할리퀸 로맨스 소설처럼 느껴지고, KBS ‘흑기사’ 같은 판타지도 있으며, SBS ‘수상한 로맨스’나 JTBC ‘품위 있는 그녀’처럼 다분히 현실적인 요소에 기반을 둔 작품도 있는 등 장르도 다양하다. 남녀 관계로 바뀌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클리셰가 곳곳에서 눈에 띄지만, 여성들끼리 공유하는 특별한 요소들은 기존 드라마와는 다른 독특한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낸다. 이 의미는 뻔한 로맨스, 그 이상이다.

MBC ‘불야성’ 서이경, 이세진

“한 번 탐낸 건 절대 놓치지 않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대사의 향연이라는 점이 ‘불야성’ 속 서이경(이요원)과 이세진(유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서이경은 금융가 큰손인 아버지에게서 동전 한 닢도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기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인물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세진의 패기에 매력을 느낀다. 서이경은 경쟁사와의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일부러 이세진을 자기 대신 사지로 몰아넣기도 하는데, 뒤늦게 그 사실을 안 이세진이 비에 쫄딱 젖어 화를 내자 유유히 차에서 내려 말한다. “감기 걸리겠다.” 할리퀸 로맨스 소설이나 팬픽션뿐만 아니라, 온갖 드라마와 영화 속 남녀 관계를 보는 것 같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 다음 과정은 더 익숙하다. 처음에는 서이경을 거부하던 이세진도 자신처럼 화려한 삶을 살게 해주겠다는 말에 결국 그와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자신의 회사에 입사하라는 서이경의 제안은 “신하로 만들 거”라는 말에서 단순한 ‘입사’와 다르다. 그동안 여성들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던 적극적인 권력추구형 관계 맺기다. 보통 한국 드라마에서는 권력과 부를 가진 남자 주인공이 가난한 여성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제시하지만 여성은 계속 자신의 부족한 틀 안에서 바지런히 살아간다. 하지만 자신의 부하가 되면 그에 응당한 권력과 부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이세진을 옆에 두려는 서이경과 이를 자신의 운명을 바꿀 기회로 욕심내는 이세진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끌림을 긍정하는 동시에 가난한 여성의 활동 반경을 넓히며 그들도 사회에서 ‘킹 메이커’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 주인공과의 로맨스란, 논외의 것이 될 수밖에.

SBS ‘수상한 파트너’ 은봉희, 차유정

“처음 만나고 되게 맘에 들었거든요.”

‘수상한 파트너’ 속 은봉희(남지현)와 차유정(나라)의 첫 만남은 다소 과장된 액션 신으로 시작한다. 카페에서 단체 절도범들을 단숨에 제압해나가던 차유정은 뒤에서 의자를 들고 공격해오는 남성에게 꼼짝없이 당할 위기에 처한다. 이 모습을 본 은봉희는 바로 뛰어 들어와 남성을 걷어차며 차유정을 구한다.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각각 변호사와 검사라는 것을 밝힌 두 사람은 “신기하고 반갑다”며 기뻐하는데, 은봉희의 몸이 괜찮은지 챙기는 차유정의 모습은 마치 남녀 주인공이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를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두 사람이 헤어지며 “친구 사귄 기분”이라고 말하는 상황은 로맨스를 전제로 한 남녀 주인공 사이에서는 잘 나오지 않는 대사고, “은 변호사 같은 스타일을 내가 너무 좋아한다”에 이어 “나야말로 차 검사님 내 스타일”이라고 대화를 주고받을 때는 공공의 적을 함께 물리치고 나서 인사를 나누는 쿨한 히어로들 같은 느낌까지 든다. 이처럼 담백하게 출발한 관계는 노지욱(지창욱)을 두고 두 사람이 맞붙었을 때 상대적으로 격렬해지는데, 경계는 할지언정 흔한 드라마 속 연적 관계처럼 서로를 해치거나 모함하려 들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도 않는다. “짜증 나. 나 은변 처음 만나고 되게 맘에 들었거든요. 근데 왜 하필 당신이야?” “누군 안 나요? 나도 그쪽 되게 마음에 들었었고 하필 사귀어도 뭐 이렇게 예쁜 여자만 사귀었었나….” 자존심을 세우며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대신, 서로의 장점을 언급하며 다퉈대는 두 사람의 모습은 지켜보던 다른 여성 검사가 “지랄도 풍년”이라고 할 정도로 황당하고 재미있다.

JTBC ‘품위 있는 그녀’ 우아진, 박복자
“나 정말 사람같이 살고 싶었어요. 기깔나게.”

‘품위 있는 그녀’의 우아진(김희선)과 박복자(김선아)는 이름에서부터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부와 명예라는 조건 속에서 한국 사회의 양극단에 속한 두 여성은 처음에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해 있다. 촌스런 옷차림에 사투리까지 쓰는 박복자를 보며 우아진은 시혜적인 태도를 고수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과거 호텔에서 일하던 박복자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선물을 건네며 유일하게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 상류층 사람이었다. 그 모습에 동경을 품은 박복자는 상류층에 편입해 우아진처럼 우아한 여성이 되기를 꿈꾸다가, 간병인으로 그의 집에 들어와 안태동(김용건) 회장을 몸으로 유혹해 그토록 원하던 사모님이 된다. 처음에는 박복자의 해박한 미술 지식에 우아진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시작된 별것 아닌 공감대가, 두 사람이 같은 집안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는 무엇을, 왜 욕망하는가/했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으로 합쳐지게 되는 순간이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유독 뻔뻔하거나 능력 부족이다. 안태동 회장은 박복자를 새 배우자로 냉큼 선택하고, 우아진의 남편인 안재석(정상훈)은 딸의 미술 선생님과 바람을 피우다 들켜도 이혼은 안 된다고 징징댄다. 이런 상황에서 우아진과 박복자는 서로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 우아진이 돈을 가지고 도망친 박복자에게 “왜 도망갔냐”고 질책하자 그는 울면서 말한다. “누가 훔쳐갈까 봐. 난 평생 도둑질만 당하고 살았거든.” 남성들의 세계에 보폭을 맞추느라 자기 자신을 잃어가던 우아진 또한 그 말에 아픈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우는 박복자의 등을 자기도 모르게 감싸 안는다. 남성의 재력 없이는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없었던 여성들만이 갖는 아픈 과거가 있고, 서로에게 “원하는 게 뭐냐”고 진지하게 묻거나 말없이 안아줄 수도 있다. 다만, 우아진은 마지막에 ‘재벌집 며느리’ 대신 이혼을 택하는 반면 박복자는 집안에 문제를 일으킨 원흉으로 취급당하다 죽음을 맞는다. 이름부터 최후까지 너무 다른 두 여성의 관계는 더 절절하고 슬프다.

KBS ‘흑기사’ 정해라, 샤론, 장백희

“내가 원하는 걸 한 가지 줄래요? 내가 당신이 되게 해줘요.”

전생의 연이 현생까지 이어진다는 말이 있지만, ‘흑기사’ 속 세 여성의 관계는 좀 희한하다. 모두가 함께 전생에서 현생으로 환생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샤론(서지혜)은 전생에 남편 이명수(김래원)가 사랑했던 분이(신세경)를 미워하다 못해 둘을 함께 태워 죽인다. 그러나 그 벌로 샤론은 환생하지 못하고, 인간도 귀신도 아닌 몸으로 여태껏 살아 있다. 그러니 문수호(김래원)와 정해라(신세경)로 환생한 이들이 다시 사랑에 빠진 게 아니꼬울 수밖에. 샤론은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정해라의 인생을 앗아가려 든다. 하지만 샤론은 의외로 유치한 자신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해 장백희(장미희)에게 “200년 넘게 살았으면 현명해지라”고 혼이 난다. 나쁜 짓을 일삼는 샤론이 못마땅한 장백희도 전생에 샤론과 정해라의 운명을 바꿔놓은 죄로 아직까지 저주에 싸여 살아가는 존재다. 정해라에게 항상 다정하지만, 200년 넘는 시간을 함께 해온 샤론에게 더욱 각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샤론은 막무가내인 행동을 해서 그에게 매섭게 엉덩이를 맞고도 “옛날보다 많이 약해졌다”며 뻔뻔스럽게 구는 철부지다. 샤론이 나쁜 짓을 저지를 때마다 주의를 주면서, 누구보다 바쁘게 상황 수습에 나서는 그의 모습은 강한 책임감을 지닌 보호자 그 자체다. 고집불통 철부지 여성과, 전생이든 현생이든 자꾸만 인생이 꼬여서 피곤한 여성, 그리고 이 두 여성을 책임지느라 절절 매는 여성의 삶이 얽혀 판타지 소설 같은 대사와 장면을 만들어낸다.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닌 세 사람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는 철부지부터 현명하고 침착한 캐릭터까지 모두 여성들의 몫이라는 점에서 재미있다. 이 정도로 여성 캐릭터들‘만’ 도드라지는 설정은 분명 흔치 않다.

tvN ‘부암동 복수자들’ 김정혜, 홍도희, 이미숙

“우린 가족보다 나은 남이 될 테니까.”

재벌가 세력다툼에서 밀리게 생긴 남편이 혼외자인 아들을 데려오자 김정혜(이요원)는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교육감 후보의 아내 이미숙(명세빈)과 학교폭력에 얽혀 고통받는 아들을 구하려는 생선장수 홍도희(라미란)를 발견한 김정혜는 자신과 ‘부암동 복수자 소셜클럽’을 결성할 것을 제안한다. 이들의 만남은 마치 남성들 중심으로 꾸려진 의리 모임을 연상케 하지만, 각자가 지닌 내막은 남성들이 쉽게 겪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들은 이해관계로 얽힌 남성들이 성폭력, 거짓말, 정경유착, 학연과 지연 담합 등 온갖 부정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희생양들이고, 남편의 체면, 욕심을 모른 체하며 살아가다 자신이 부정당하는 정도에 이르자 가부장제와 부자들의 세계에 복수를 계획한다. 처음에는 부잣집 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홍도희의 복수를 재벌가 여성인 김정혜가 돕는 것으로 시작된 복수는 점차 거대한 권력을 상대하는 쪽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들이 계획하는 복수는 남편들이 행한 것처럼 폭력적이거나 비열하지 않다. 양가 능력이 필요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 김정혜는 “나를 빼면 너한테 뭐가 남겠냐”는 말에 “내가 남겠지”라고 당당하게 응수한다. 이미숙은 딸 때문에 폭력적인 상황을 견디다 못해 결국 기자회견을 열기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홍도희는 두 사람의 든든한 언니가 되어주고, 갈 곳을 잃은 이미숙 모녀에게 잘 곳을 내어주며 따스한 버팀목이 된다. “엄마, 더 강해질 거야. 널 위해서, 그리고 날 위해서.” 마지막에 이르러 이미숙이 꺼낸 말은 모성이 얼마나 위대한지가 아니라, 여성들끼리의 연대가 왜 필요한지에 관한 이야기다. 앞선 여성이 강해져야 다음 세대의 여성도 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엄마’, 아니 사실은 ‘여자’에 붙는 편견을 깨는 힘이란, 결국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끼리의 공감을 바탕으로 한 연대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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