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썸남은 필요 없다

2018.01.25
최근 몇몇 기사에서 MBC ‘나 혼자 산다’에 출연 중인 기안84를 ‘국민썸남’이라고 소개했다. 개인적으로 TV와 가까이 지내지 않은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져 찾아봤다. 지난해, MBC 연예대상 후보에 오른 박나래는 “국민 여러분들이 지금 가장 염원하는 게 그거인 것 같다”라며 “(만약 내가 대상을 받는다면) 기안84님과 결혼하겠다”는 농담 섞인 공약을 내걸었다. 그 시상식에서 박나래와 기안84는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고, 기안84는 “여자가 말했는데 빼는 건 아닌 것 같다”며 결혼 공약을 지키겠다고 말한 후 즉흥적으로 박나래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고, 시청자들이 보는 자리에서 결혼하겠다고 밝힌 결과로 두 사람은 ‘국민’이 인정하고 애정하는 ‘썸남’과 ‘썸녀’가 되어 있었다.

‘국민썸남’이라는 단어는 매체의 호들갑 섞인 관습적 표현일 뿐, 그 자체에 특별한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표현이 등장하기 전부터 ‘나 혼자 산다’에서 박나래와 기안84가 은근히 로맨스의 기운을 풍기며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기안84가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박나래와 ‘썸’을 타는 캐릭터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이다. 그의 정돈되지 않은 생활 습관은 처음부터 화제가 되었다. 집을 제대로 구하지 않고 웹툰을 연재 중인 회사의 사옥에서 자신의 자취방인 것처럼 살아가는가 하면, 주방 가위로 아무렇게나 머리카락을 자르고, 전기 포트에 족발과 라면을 바로 넣어 끓여 먹었다. 최근 방송분에서는 전날 신은 후 방바닥에 굴러다니던 양말을 한 번 더 신고 시상식에 참석한 기안84의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 독특한 라이프스타일이라고 하기에는 성인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생활 감각에서 심하게 벗어나 있음에도, 그의 행동은 꾸미지 않아 평범하고 진정성 넘치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게 기안84는 예능에서는 전례 없이 특이한 동시에 또래 남성들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무사히 안착했다. 자신의 생활을 제대로 책임지지 못하는 캐릭터로, 공중파 방송에서, 이만큼 자리를 잡고 이 정도로 뜰 수 있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남성일 경우 ‘이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는 신호에 가까운 건 아닐까? 그의 행동이 딱히 개선되지 않은 상황에서 박나래와의 러브라인이 캐릭터로 굳혀지고 ‘국민썸남’의 포지션을 차지하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일까. ‘나 혼자 산다’ 속 기안84와 박나래의 러브라인은 마치 한국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이퍼리얼리티에 가깝게 느껴진다. 방송은 박나래에게 협의되지 않은 이마 뽀뽀를 한 후 무대에서 내려와서야 사과하고, 박나래를 챙기거나 예뻐하는 기안84를 끊임없이 보여주며 그를 제법 괜찮은 결혼 상대로 묘사한다. 생활에서 성인 한 사람분의 몫을 하지 못하는 기안84조차 얼마든지 로맨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로맨스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 훈훈한 남성이라는 캐릭터를 획득한다. 역시 남성일 경우 ‘이렇게 살아도 연애를 하거나 결혼하는 데 딱히 문제가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혼하기 괜찮은 남성의 기준을 한없이 느슨하게 정의하는 이 풍경에서, 2017년 논란이 되었던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저출산 대책 관련 발표 내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성의 교육수준과 소득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하향선택결혼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관습 또는 규범을 바꿀 수 있는 문화적 콘텐츠 개발이 이루어져야 함. 이는 단순한 홍보가 아닌 대중에게 무해한 음모수준으로 은밀히 진행될 필요가 있음.” 당시에는 비웃고 지나갔지만 지금은 정말 그런 정책이 시행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나 혼자 산다’에서 전현무가 박나래에게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어차피 남편은 기안84”, 즉 ‘어남기’다. ‘나 혼자 산다’가 아니라 마치 ‘아직은 나 혼자 산다’, 또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나 혼자 산다’인 것처럼 혼자 살기를 결혼의 전 단계쯤으로 인식하는 발언들도 계속된다. 지난 12일 방송에서는 주변으로부터 결혼할 것을 강권당하고 있는 이필모가 “혼자 사는 게 익숙해졌다”고 말하자 박나래가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라고 받아치는 장면이 등장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나래와 기안84의 ‘썸’ 서사 이후 ‘나 혼자 산다’의 시청률은 상승세를 타고 있다. 결혼하지 않은 남성과 여성이 소위 말하는 러브라인을 형성하고, 시청자들은 그들을 지켜보며 ‘썸’인지 아닌지, 진심인지 아닌지, 누가 더 적극적인지, 누가 더 아깝거나 잘났는지, 정말로 결혼에 이를 것인지 아닌지 추측하고 판단하며 재미를 느끼는 상황이 반복됐다. 결혼 상대를 평가하는 데 있어 남성에게만 관대한 분위기, 결혼과 짝짓기에 쏠리는 기이할 정도의 관심과 집착. 그리고 ‘국민썸남’이라는 호칭. 정말 굳이 그래야 할까. ‘국민썸남’의 그 ‘국민’에서 적어도 나는 빠지겠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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