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팬서│② 와칸다의 여자들

2018.02.20
‘블랙팬서’에서는 트찰라/블랙팬서(채드윅 보스만)와 에릭 킬몽거(마이클 B. 조던)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여자 배우가 돋보인다. 사실상 와칸다 왕국의 운영 실무는 거의 여성이 도맡고 있고 각 캐릭터의 개성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블랙팬서의 어머니 라몬다(안젤라 바셋)는 와칸의 정신적 지주로서 위기의 상황에 침착하게 판단하고, 블랙팬서를 수호하는 특수군 도라 밀라제는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아이언맨보다도 능력 있는 여성 과학자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캐릭터들은 왠지 낯이 익은 배우가, 혹은 아예 처음 보는 신인이 연기하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스크린 밖 모습까지 궁금하게 만드는 ‘블랙팬서’의 네 배우의 이모저모를 정리해보았다.

루피타 뇽 as 니키아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무술 실력까지 빼어난 와칸다의 스파이 니키아. 영역을 넘나드는 활약상은 그를 연기한 루피타 뇽도 못지않다. 최근 몇 년 새 보여준 행보는 거의 ‘도장 깨기’에 비유할 수 있다. 목화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노예 팻시로 분한 ‘노예 12년’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 ‘블랙팬서’ 등에 연달아 합류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팬덤을 가진 두 프랜차이즈의 일원이 됐다. 작품성과 흥행성을 고루 갖춘 필모그래피를 단숨에 쌓은 루피타 뇽은 뷰티·패션계가 가장 주목하는 스타 중 하나이기도 하다. ‘노예 12년’으로 무려 60여 번의 레드카펫 행사에 참석한 그의 드레스는 당시 영화계 최고 이슈 중 하나였고, 모든 패션지가 그의 독특한 스타일을 앞다투어 분석했다.

루피타 뇽은 자신의 매력과 성장세의 힘을 단단한 자존감에서 찾는다.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곱슬머리가 싫어서 억지로 머리를 펴느라 많은 시간과 돈을 소비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만하자”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삭발을 한 후 변했다고 한다. “지금은 나의 머리를 사랑한다. 머리를 땋는다든지,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한다.”(‘얼루어’) 스스로에게 당당한 루피타 뇽은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야 하는 순간도 잘 알고 있다. 최근 루피타 뇽은 ‘뉴욕 타임즈’에 실은 기고문을 통해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행을 폭로했다. “우리를 고립시키고 계속 해를 끼치는 수치심과 싸워야 한다. 더 이상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된다.”

다나이 구리라 as 오코예

미국 드라마 마니아들에게는 와칸다를 지키는 호위 전사 오코예의 얼굴이 꽤 반가웠을 테다. ‘워킹 데드’ 시리즈에서 멋지게 좀비를 해치우던 미숀을 연기한 다나이 구리라가, ‘블랙팬서’에서도 팬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파워풀한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킹 데드’나 ‘블랙팬서’는 그의 커리어의 일각에 불과하다.

다나이 구리라는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각광받고 있는 저명한 극작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자신의 예술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낸 아티스트를 만나 영향을 받았던”(‘롤링 스톤스’) 그는 꾸준히 연극 창작을 하고 있다. 특히 토니상 6개 부문 후보에 오른 연극 ‘이클립스드’는 뉴욕 브로드웨이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당시 성노예들을 다룬 이 작품은 모든 배역을 루피타 뇽을 포함한 여성 배우가 연기했고, 작가와 감독 또한 여성이다. 이는 브로드웨이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우리는 남성의 시각을 통해 여성의 내러티브가 규정되는 것에 익숙해져왔다. 나는 하나의 콘셉트로서 도전했다. 왜 여성 배우로만 구성을 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재밌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을 두고 왜 남자들로만 구성했냐고 묻지는 않지 않나. 이 무대에서 본질적인 목소리는 남자가 아닌 여성의 것이다.”(‘보그’) 한편 전 세계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활동가로서의 행보도 눈에 띈다. 2년 전 발렌타인데이에 비영리단체 ‘우리의 소녀들을 사랑하라(Love Our Girls)’를 직접 설립한 그는 정기적으로 소식지를 발간하고 모금을 주선하고 있다.

안젤라 바셋 as 라몬다
블랙팬서의 어머니 라몬다를 위엄 있게 연기한 안젤라 바셋은 흑인 인권 운동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블랙팬서’에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드라마 ‘말콤X’에서 베티 샤바즈로, ‘베티 앤 코레타’에서 코레타 스콧 킹으로 분했다. 말콤 X와 마틴 루터 킹의 배우자를 모두 연기한 것이다. 또한 CBS 드라마 ‘로사 파크 스토리’에서는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 양보를 거부하며 이후 흑인 인권 운동을 촉발시켰던 장본인인 로사 파크 역을 맡았다. 실존 인물 연기에서 특히 두각을 드러냈던 그의 대표작은 단연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영화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이 작품에서 안젤라 바셋은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남편이자 작곡가 아이크 터너에게 지속적인 학대를 당했던 가수 티나 터너를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그의 연기는 최근 영국 영화 협회(British Film Institute, BFI)에서 실시한 평론가 설문에서 역대 최고의 흑인 배우 퍼포먼스로 선정되기도 했다. 최근의 안젤라 바셋은 연출자로도 활동 영역을 넓혔다. ‘사랑을 기다리며’에서 함께 공연했던 휘트니 휴스톤의 인생을 다룬 TV 영화 ‘휘트니’를 만들고, 드라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의 일부 에피소드 등을 직접 연출했다. 그렇다면 이런 상상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안젤라 바셋이 감독을 맡은 흑인 전기 영화를 극장에서 만날 수도 있다고 말이다.

레티티아 라이트 as 슈

어쩌면 토니 스타크보다 천재일 수도 있다. 과학 강국이라는 와칸다 왕국에서 과학 기술 파트의 수장을 맡은 슈리는 첨단 과학을 연구하고 온갖 비브라늄 무기를 만든다. 주로 백인 남성이 도맡던 과학자 캐릭터에 차별성을 만든 레티티아 라이트는 이제 막 할리우드에 진출한 24살의 신예다. 원작 코믹스보다 훨씬 밝은 슈리의 캐릭터는 실제 레티티아 라이트의 모습이 반영된 결과다. “삶에서 기쁨과 사랑, 빛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원래 성격대로 연기하는 것을 감독이 요구했다.”(‘덴 오브 긱’) 여기에 기술을 사랑하는 소녀들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연기에 큰 영감이 됐다. “슈리가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를 그 아이들도 겪었다. 넌 여자아이니까 이렇게 과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소녀들을 위해 연기했다. 아이들의 다큐멘터리를 보며 그들은 그들의 나라를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것은 와칸다를 위해 헌신하는 슈리의 모티베이션이 됐다.”

남아메리카 가이에나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자란 그는 ‘블랙팬서’의 개봉 시기이기도 한 ‘흑인 역사의 달’에 운명처럼 첫 연기를 했다. 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한 연극에서 맡은 역은 로사 파크였다고. 이후 10대 시절 영국 컬트 코미디 시리즈 ‘큐컴버’ ‘바나나’, 영화 ‘도심 속의 찬가’, BBC 드라마 ‘휴먼스’ 등에 출연해 연기 경력을 쌓고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합류하게 된 그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선택도 받았다. 곧 개봉 예정인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핵심 캐릭터로 출연할 예정이라고. ‘블랙팬서’ 개봉 이후 관객에게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라는 호평을 받고 있는 만큼,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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