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타 거윅, 욕망하고 실패하는 지금의 여성

2018.03.02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카톨릭 고등학교에서 졸업을 앞두고 있는 크리스틴(시얼샤 로넌)은 언제나 누구에게나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소개한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 대신 자신이 직접 붙인 이름을 고집하는 그는 고요하고 지루한 마을, 별 볼 일 없는 집안, 평범하디 평범한 인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레이디 버드는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빨갛게 물들이고, 학교에서 잘나가는 친구들을 사귀어보기도 하고, 좋아하는 남자아이와의 섹스를 경험하기도 하며, 뉴욕 혹은 코네티컷, 뉴햄프셔처럼 “문화가 있는” 동부 도시의 대학으로 진학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친구는 물론 연인과의 관계도 뜻대로 풀리지 않고, 학비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엄마는 그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심지어 레이디 버드는 실직한 아빠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아왔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삶의 방향으로 걸어 나간다. “나는 뭔가를 경험하면서 살고 싶어.”

그레타 거윅이 직접 쓰고 연출한 영화 ‘레이디 버드’는 특별한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때로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걸 알지만, 내 능력으로는 쉽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삶으로 나를 이끌어가고 싶은 거의 모든 여성의 이야기다. 그레타 거윅은 레이디 버드를 ‘욕정적’이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낼 줄 아는 젊은 여성이다.” 지금껏 그레타 거윅이 직접 연기하고 공동 집필한 작품들 속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프란시스 하’의 프란시스 할러웨이(그레타 거윅)는 애매한 재능이 고민이지만 프로 무용수가 되기를 꿈꾸며, 친구 소피(믹키 섬너)와는 유치한 농담이나 조금은 허황된 미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영원히 붙어 다니고 싶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를 현실감각 없는 소녀 취급하고, 소피는 인생의 다음 챕터로 넘어가려는 중이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 역시 뉴욕에서 야심차게 대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어쩐지 겉돌기만 하는 작가 지망생 트레이시(롤라 커크), 꿈은 원대하고 허세는 가득하지만 정작 손에 쥔 것이라곤 없는 서른 살 브룩(그레타 거윅)을 보여준다.

“그런 영화들은 어떤 이유로 영화 속에서 사라진 캐릭터들에 대한 것이다. 아마 그들이 하드한 여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당신이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나는 그처럼 터프한 종류의 여성들이 그리웠다. 그들은 소녀(girls)가 아니다. 그들은 여성(women)이다.” (‘WRITERS GUILD of AMERICA EAST’) 그레타 거윅의 여성들이 유난히 돌출된 자의식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현실에서도 그렇듯 많은 작품에서 평범한 여성들의 욕구는 어떤 것이든 무시되거나 불편한 것으로 여겨진다. 더불어 여성의 실패는 인생을 무너뜨릴 정도의 비극으로 그려지고는 한다. 그레타 거윅은 주변의 비난과 비웃음과 의심을 사면서도 욕망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실패를 겪고,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가는 여성들을 조용히 지켜본다. ‘프란시스 하’는 적당히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예술가의 삶에 적당히 근접한 상태로 적당한 자기만의 방을 얻는 데 성공한 프란시스의 모습으로 끝난다. 누군가는 프란시스가 끝내 실패했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그는 필요하고 원했던 것들을 놓치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삶을 붙잡으며 살아간다. ‘미스트리스 아메리카’의 두 여성 또한 작가로서, 사업가로서 위기를 겪지만 그대로 멈추지 않는다. 실패는 그들의 인생을 망쳐놓지 못하고 그들은 그 경험을 온몸에 품은 채 그냥 또 한 번, 살아나갈 뿐이다.

‘레이디 버드’는 레이디 버드의 뉴욕 생활을 길게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가족을 뒤로하고 뉴욕으로 떠나온 그의 앞날은 예상과 달리 시시하거나 상상 이상으로 고될지 모르지만, 하지 않고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중요한 것은 누구도 아닌 레이디 버드 스스로 선택해냈다는 사실이다. 여성은 꿈꿀 수 있고, 여성은 실패할 수 있다. 어리석거나 옳지 않아 보이는 선택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현실의 여성들은 언제나 그렇게 살아왔으며, 결국 그레타 거윅이 발견한 것은 완벽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으로서 여성의 삶 그 자체다. 덕분에 엄마와 딸, 절친한 친구, 언니와 동생 등 각자의 삶을 중심으로 사랑하고 싸우고 믿고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는 여성과 여성 간의 복잡하고 애틋한 관계 역시 그레타 거윅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레이디 버드’의 연출을 노아 바움백에게 맡기려다 본인이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는 그레타 거윅의 고백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온전한 여성의 손과 입으로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여성이 그 이야기를 보고 듣고 다시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지금 여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2018년, 지구 상의 그 어느 곳에서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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