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사람을 홀리는 영화

2018.03.29
*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사람을 홀리는 영화다. 곱씹어 생각하게 만들기보다 보는 순간 사로잡아 버린다. 나른한 여름날, 17세 소년 엘리오(티모시 샬라메)는 이탈리아 북부의 가족 별장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다. 어느 날 언어학자인 건장한 미국 청년 올리버(아미 해머)가 이곳을 찾는다. 한정된 계절과 공간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사랑 이야기. 만일 이 영화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 든다면 영화와 온전히 마주하는 데는 실패할 것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정념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에는 이렇다 할 외적 갈등이 없다. 동성의 사랑을 둘러싼 사회적 금기나 적대감, 감시의 시선은 애초에 배제되어 있다. 여기에는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느끼는 감정을 지지하는 이상적인 부모가 존재한다. 엄마는 둘 사이의 메신저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게다가 엘리오의 여자친구 마르치아는 훗날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를 원망하기는커녕 먼저 손을 내밀며 우정을 다짐한다. 이 영화에는 현실의 얼룩이나 정치성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인공적인 세계처럼 보일 지경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영화는 외적 갈등의 빈자리를 뜨거운 여름을 닮은 엘리오의 내면의 풍경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이를 위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선택한 방법론은 논리적으로 정교한 내러티브가 아닌 눈과 귀, 피부를 자극하는 농밀한 감각의 언어다. 영화가 길어내는 감각성이 곧 첫사랑에 빠진 소년의 내면, 그러니까 약동하는 정념의 고유한 풍경인 것이다.

영화 초반부, 엘리오의 아빠와 올리버는 살구의 어원에 대해 토론한다. 이 장면은 부르주아 엘리트적인 영화의 무드에 얼마간 일조하고 있고, 또 영화의 제목이 담고 있듯 ‘호명하기’에 대한 존재론적 함의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이후 등장하는 영화 속 장면들과 충돌하며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를 강조하는 장치로 보인다. 정작 영화의 카메라가 끈질기게 붙드는 것은 이러한 토론 장면이 아니라, 엘리오가 마당의 물기 가득한 살구를 직접 따고 베어 물고 만지면서 그 풍요로운 맛과 향, 촉감을 체험하는 감각 그 자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의 관심사는 이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아니 그것을 초과하는 정념의 타래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가장 탁월한 지점은 엘리오와 올리버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기 전까지 약 한 시간을 섹슈얼한 긴장감으로 팽팽하게 지탱해낸다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 엘리오는 올리버를 동경하는 것 같기도, 질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것인지 그를 약 올리고 싶은 것인지 애매한 구석도 있다. 이러한 혼란이 발생하는 까닭은 영화가 올리버의 감정을 고의적으로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올리버의 시점이라 부를 만한 장면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다양한 층위로 해석 가능한 엘리오의 내면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맥락이 불투명한 올리버의 내면. 바로 이러한 비대칭의 시선이 영화 초반의 섹슈얼리티를 생산한다.

‘아이 엠 러브’, ‘비거 스플래쉬’에서도 그랬듯 제한된 공간에서의 동선 활용을 즐기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영화에서 엘리오의 사랑을 공간으로 표현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곧 “방을 빼앗기겠네”라고 말하는 엘리오의 표정에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약간의 기대와 흥분이 서려 있다. 방은 내밀한 사적 공간이다. 엘리오가 낯선 올리버에게 방을 내어주면서 “My room is your room”이라고 말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어렵게 마음을 꺼내는 장면에서는 1차 세계대전 동상을 가운데 놓고 맞은편에서 서로를 탐색하던 두 사람이 반대 지점에서 출발해 결국 한곳에서 만난다. 이어 엘리오는 자신만의 아지트인 물가로 올리버를 데려간다. “내가 이곳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엘리오 앞에서 올리버는 물에 머리를 적신다. 엘리오는 자신의 세계로 올리버를 초대했고, 올리버는 기꺼이 거기에 발을 담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화의 긴장을 지탱하던 비대칭의 시선에서 벗어나 이윽고 첫 키스를 나눈다. 흥미로운 점은 올리버의 감정을 확인한 후에도 엘리오의 내면은 정의 내리기 힘들 정도로 입체적이라는 것이다. 엘리오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다. 이는 그가 별안간 코피를 흘리거나 구토하거나 눈물을 터뜨리는 것으로 은유된다. 자기 몸집에 맞지 않는 올리버의 커다란 셔츠를 입은 엘리오의 모습처럼 첫사랑의 감정은 이토록 미성숙하며 생의 리듬을 뒤흔들 정도로 버거운 것이다.

여름이 영원하지 못하듯 올리버는 엘리오를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사랑은 마지막 불꽃처럼 타오른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사랑에 어떤 이름도 쉽게 붙이지 않는다. 거대한 폭포가 쏟아지는 자연(nature) 앞에서 아이처럼 뛰노는 두 남자의 사랑을 본성(nature) 그 자체로 바라볼 뿐이다. 정치, 사회적 제약과 시련이 존재하지 않는 이 유토피아에서 그들은 말로 설명하기엔 막연하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하는 사랑의 영원성을 경험한다. 올리버가 떠나고 슬픔에 빠진 엘리오를 위로하며 아빠는 말한다. “네가 가졌던 감정을 온전히 느꼈으면 좋겠어.” 그들의 감정을 쌓아가는 영화의 문법이 그렇듯, 사랑의 환희는 물론 다가올 애도의 시간까지도 언어나 지성 속으로 도망치려 하지 말고 오직 감정으로 담대히 통과해내라는 의미일 것이다.

겨울, 고요히 하강하는 눈의 이미지 속에서 엘리오가 다시 등장한다. 전화가 걸려오고, 나지막이 올리버의 음성이 들린다. 올리버와 통화를 마친 엘리오는 벽난로를 바라보며 망연하게, 아주 오랫동안 앉아 있다. 그의 뒤로는 한층 거세진 눈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가족들은 분주히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다.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사운드가 무심하다. 화면에 두 번 등장하는 책 ‘우주의 파편들’의 저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말을 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 엘리오에게 다시 여름은 찾아오겠지만 지나간 여름은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것이 농밀한 감각의 언어로 빚어낸 이 영화가 환기하고 있는 첫사랑의 기억일 것이다. 지금 엘리오는 영원히 반복되지 않을 첫사랑이 남기고 간 열병을 혼자 오롯이 앓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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