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그 남자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2018.06.07
* 영화 ‘버닝’의 내용이 있습니다. 

“그녀와는 아는 사람 결혼 피로연에서 만나 친해졌다. 삼 년 전의 일이다. 그녀와 나는 열두 살 가깝게 나이 차가 났다. 그녀는 스물이고 나는 서른하나였다.” ‘헛간을 태우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화자인 ‘나’의 나이는 서른하나, 그는 자신보다 열두 살 연하인 어떤 여성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참이다. 이창동 감독이 연출한 ‘버닝’의 원작인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놀라운 점이 있다. 일단, 영화는 소설을 정말이지 충실하게 옮겼다. 그런데 두 작품이 같은 이야기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두 가지 감상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려는 참이다.

영화 ‘버닝’은 소설의 화자 ‘나’와 종수(유아인)가 다른 인물임을 명백히 보여주며 시작한다. 그는 삼십 대가 아닌 이십 대고, 이제 막 재회하는 해미(전종서)와는 동갑이다. 두 사람 모두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간을 보내는 중으로, 두 사람은 해미의 집에서 섹스를 한다. 해미의 집에는 고양이 보일이가 있다고 하는데 종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종수에게 보일의 밥을 부탁한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남자와 함께다. 벤은 두 사람보다 연상이며, 부자 백수다. 해미는 벤과 가깝게 지내고, 가끔 종수와 셋이 어울린다. 어느 날 해미와 벤이 파주의 종수 집으로 찾아온다. 벤은 소설을 쓴다는 종수에게 자신이 종종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한다. 곧 또 하나를 태울 예정이며, 오늘의 방문은 사실 사전답사라고. 그날 이후 해미가 사라지는데, 종수는 벤이 태웠다는 비닐하우스를 도무지 발견할 수가 없고, 혹시 벤이 태워버렸다는 것이 해미는 아닐까 의심한다.

‘헛간을 태우다’는 80년대에 쓰인 소설이다. 다소 나른하고 섬뜩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헛간을 왜 태우는지, 태웠다는 헛간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이 세련되고 차분한 말을 사용하는 젊은 남자가 불러일으킨 음산한 상상을 잠재우기 어려워한다. 그런 이야기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많은 그 또래 남자 주인공처럼, 글을 쓰고, 재즈 음악을 레코드로 듣는다. 집의 냉장고에는 화이트와인이 있다. ‘나’는 사건의 구경꾼이고 방관자다. 탐정이 아니라.

종수의 삶에 주도적 욕망이 생기는 것은 해미를 만나 사랑에 빠져서라기보다는, 해미가 벤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상정하면서부터다. 해미는 사라지기 위해 등장한 여자다. 쓰는 내용은 보이지 않지만, 종수가 노트북 앞에서 타이핑을 하는 장면이 길게 나오는 것은 해미가 사라진 뒤다. 이후의 이야기가 그 글의 내용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자위에 해미가 등장하는 것 또한 그가 죽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벤에 의해 살해당했을 수 있다는 의구심이 생긴 뒤다. 이제 그는 탐정처럼 탐문을 하고, 잠복을 한다. 소설이 거의 다루지 않는 ‘해미의 실종 이후’는, 영화에서 길고 자세한데, 이 대목 전체는 종수의 상상 속 인과관계가 만들어낸 환상처럼 보인다. 팩트가 있기는 하다. 해미의 손목시계, 해미가 말한 우물의 존재, 깔끔하게 정돈된 해미의 빈집, 벤이 갑자기 집에 들인 고양이. 숙련된 음모론자처럼 그는 단서들을 이어 붙인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종수야, 글이 쓰고 싶어? 정말로?

소설 ‘헛간을 태우다’는 ‘나’가 쓴 ‘나’의 이야기다. 주인공이 쓴 글 자체가 ‘헛간을 태우다’다. 영화에서는 그런 일치가 불가능하다. 글을 쓰고자 하는 종수의 욕망은 말로만 존재한다. 원하는 것이 불분명하니 얻기 위해 노력할 일도 난망하다. 종수가 원하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가 벤을 따라다니며 의심하는 것은 왜인가? 사랑하는 여자를 잃은 데 대한 복수심? 영화에는 어린 종수가 타오르는 불기둥을 보며 황홀경에 잠기는 장면이 있다. 어려서 어머니가 집을 나간 뒤 아버지가 옷을 태우라고 했다는 말도 나온다. 태우는 사람은 누구인가? 종수는 혹시 자신이 비닐하우스를 태웠다는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종수는 ‘태우는 사람’이 됨으로서 벤이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종수가 사랑한 사람은 해미가 아니라 벤 아닐까. 소설에서 살인은 헛간을 태운다는 은유 안에 세련되게 숨어 있다. 원작 소설이 버블경제 시기 일본의 나른한 정서에서 탄생했다면, 영화는 은유를 견디(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팩트를 엮어 음모론을 만드는, 가진 것보다 갖지 못한 것이 무엇인지 더 확실히 알고 있는 2018년의 한국에서 태어났다. 청춘도 부유함도 실체보다는 정서에 기반하여 묘사된다. 당사자보다는 바라보는 자의 정서에 의해.

소설에서 ‘나’는 그가 태울 법한 헛간을 찾아 동네를 매일 살펴보다가 이런 생각에 잠긴다. “솔직히 가끔 나는 그가 태우기를 가만히 기다리느니 차라리 내가 성냥을 그어 태워버리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영화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 그리고 머릿속에 태운다는 생각을 불어넣은 사람을 태워버리기로 한다. 태운다는 생각이, 소설에서는 음산하고 불안정하지만 없앨 수 없어 잘 달래야 하는 내면의 욕망이고, 그 결과물이 한 편의 소설이 되는 에너지라면, 영화에서는 박탈감(가졌던 적이 없으니 그것을 박탈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호하지만)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 표시가 된다. 물론 이렇게 묻는 일도 가능하리라. 누군가 무엇을 태웠다면 벤이 아닌 종수가 태운 것은 아닌가 하고. 어쨌든 해미가 사라지고서야 종수는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궁금해지는 것이다. 종수야, 글이 쓰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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