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몰아보기

이승문의 ‘블랙북스’, 정은지의 ‘대결! 여왕의 만찬’, 이다혜의 ‘소년탐정 김전일'

2018.08.03

‘블랙북스’
영화 ‘노팅 힐’의 도둑을 기억하는가. 휴 그랜트의 힙한 서점에서 책을 훔치려다 걸린 딜런 모런. 그가 그 지저분한 모습 그대로 중고 서점을 하나 차린다. 이름하여 ‘블랙북스’. ‘블랙북스’는 인류가 무사히(?) 세기말을 넘긴 2000년에 영국에서 방영했다. 세기말의 환각 상태를 벗어났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버나드(딜런 모런), 매니(빌 베일리), 프랜(템진 그렉) 세 사람만으로 이루어진 이 시트콤은 시종일관 더럽고 방탕하고 대책없다. 중고 서점 주인 버나드는 프로이트 전집이 가죽 양장이 맞느냐는 손님의 질문에 그럼 그 지폐는 가죽으로 된 거냐고 되묻는다. 매니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고요에 관한 작은 책’을 우연히 삼키고, 고요함 그 자체로 현현해 거리를 돌아다닌다. 프랜은 어렵게 취직해 며칠을 일하지만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 끝내 알아내지 못하고 타자 치는 연기만 한다. 오물 범벅의 내 현실을 치워야겠다는 다짐이 버거울 때나, 우리 모두 오물에 사니까 괜찮다는 위로가 역겨울 때마다 이 시트콤을 정주행하며 삼각형 탁구대에서 진지하게 핑퐁에 매진하는 그들을 본다. 그러곤 생각한다. 그래, 저렇게 미쳐버리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그렇게 긴장이 풀릴 즈음,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것이 ‘블랙북스’다.

p.s. 모두의 귀염둥이 사이먼 페그의 단역 모습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덤이다.
글. 이승문(KBS PD, 다큐멘터리 ‘땐뽀걸즈’ 감독)

‘대결! 여왕의 만찬’
‘대결! 여왕의 만찬’은 2006년 이래로 꼬박꼬박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방영된 BBC의 장수 시리즈다. 영국 8개 지역을 대표하는 24명의 요리사가 중요한 연회를 걸고 경쟁을 벌인다. 시즌 1에서는 영국 여왕의 생일 잔치였고, 파리 주재 영국 대사관의 대사 만찬과 윔블던 140주년 기념 연회 등도 있었다. 지금 넷플릭스에서 방영중인 시즌 7의 우승자는 2012년 런던 올림픽 기념 연회의 손님 100인을 대접하게 된다. 보통 푸드쇼와 달리 주 1회가 아니라 매일 방영된다. 먼저 지역 예선이다. 3인의 요리사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전채, 생선, 메인, 디저트를 하나씩 선보인 후, 상위 2인이 금요일에 코스 전체로 다시 경합을 벌여 결선 진출자가 정해진다. 8주에 걸쳐 8개 지역 대표가 정해지면 전국 대회가 열린다. 전문가가 코스마다 선정한 상위 3개씩을 시청자 투표에 붙여 최종 메뉴가 결정된다. 문제는 영국이 인사말로라도 미식으로 유명한 나라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특히 외국인 입장에서, 심사위원의 호들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이 쇼가 종종 영국에서 제일 젠체하는 쇼로 불리는 것을 보면 영국인도 진지한 경쟁보다는 가벼운 비웃음을 곁들여 즐기는 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쇼의 재미는 출연자들의 어정쩡한 위치, 즉 성공했지만 본인의 쇼를 가지기에는 명성이 부족한 데 있다는 지적까지 있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출연자들이 하나같이 음식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고상한 막말로 요리사들을 난도질하던 심사위원들도 맛있는 것 앞에서는 사족을 못 쓴다. 요리사들은 경쟁 상대의 음식을 맛본다기보다는 먹으면서, 맛이 있으면 진심으로 기뻐한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맛있을 것 같진 않지만 그들이 느끼는 행복만은 진짜다. 시청자 입장에서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 편이 30분이라 금방이다. 밀도는 낮지만 추진력은 충분해서, 느긋한 주말 틀어놓고 딴짓을 해가며 몰아보기 최고다.
글. 정은지(번역가)

‘소년탐정 김전일’

더워 죽을 지경이라 주말 내내 ‘소년탐정 김전일’ 시리즈를 틀어놓았다. 만화책으로도 애니메이션으로도 주기적으로 몰아보곤 했는데, 이사를 거듭하며 10년간 수집했던 만화책은 동생네 집으로 입양 보내고 이제 내게 남은 것은 왓챠플레이. 소유에서 구독 서비스로 문화소비 패턴이 바뀌어간다는 말을 이만큼 잘 실천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소년탐정 김전일 Original’ 1, 2, 3기, ‘소년탐정 김전일R’ 1, 2기 중 아무 편이나 틀어놓고 외출 준비를 하거나 집 청소를 한다. 미스터리 팬이라면 누구나 알 이 작품은 패턴이 고정되어 있다. 일본의 유명한 명탐정 긴다이치 고스케의 손자임을 자처하는 소년탐정 김전일. 고등학생인 그는 가는 곳마다 연쇄 살인을 유발한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책과 마찬가지로 에피소드 4편 정도는 되어야 한 사건이 해결되는데, 이는 유사품인 ‘명탐정 코난’ 애니메이션이 일반적으로 에피소드 두 편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것과 비교하면 다소 호흡이 긴 편이며, 사건 내용도 더 잔인하고 음습하다. 미스터리물로서는 각종 밀실 살인 사건을 만들고 풀어내는 재미가 있는 데다가 도시전설, 학교괴담 등을 적극적으로 차용해 미스터리와 공포의 요소를 잘 섞어낸다. 밤에 틀어놓으면 제법 으스스한 맛도 있다는 뜻이다. ‘소년탐정 김전일’은 트릭을 비롯한 미스터리의 ‘기술적’인 다양한 요소를 경험하기에 제법 좋은 작품이지만, 작품 속 여성캐릭터들이 김전일의 ‘사춘기 소년성’(사건을 풀 때는 똑똑하다가도 좋아하는 미유키와 단둘이 있을 때는 그녀를 벗겨보거나 만져보기 위해 눈이 풀리며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는 식으로 캐릭터 자체가 호색한이라는 설정이다)을 코믹하게 드러내는 용도로 빈번히 활용된다는 단점이 있다. 살인의 동기는 대체로 신파적인 요소가 부각되므로, 앞서 언급한 김전일 캐릭터와 마찬가지로 시대에 뒤처지는 감을 막을 순 없다. 그럼에도 일본이 잘 만드는, 공포를 가미한 트릭 중심의 본격파 미스터리물이라면 이 시리즈를 따라잡을 작품은 거의 없다.
글.이다혜(북칼럼니스트,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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