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선│① 역사를 쓴 여자

2018.09.18
지난 23일 KBS ‘해피투게더’‘전설의 조동아리-여름특집 토크 MT’에 박미선이 출연했다. 2015년 10월 1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하차한 후 3년여 만에 게스트로 돌아온 그는 출연 이유에 대해 “그것(연극) 때문에 여기 나온 거예요. 뭐 하러 ‘해피투게더’를 나오겠어요?”라고 말했고, 다른 출연진은 적지 않게 당황하며 이를 웃어넘겼다. 하차 당시 7년째 ‘해피투게더’에 출연 중이던 박미선은 모두 의아해했을 만큼 갑작스럽게 떠나야했다. 그리고 ‘안방마님’에서 게스트가 된 지금, 박미선은 과거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으로 삼는다. 그 자리가 박미선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메인 MC의 역할을 맡고 있는 유재석과 그의 사적인 친분관계로 이루어진 ‘조동아리’ 멤버들이 진행하는 코너였다는 점은, 여러모로 상징적이다. 박미선은 이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방송 환경에서 30년 이상 일하며 살아남은, 사실상 유일한 여성 예능인이다.

‘해피투게더’ 하차에 앞서 2014년 11월, 박미선은 6년간 진행했던 MBC ‘세바퀴’에서 하차했다. 이 사건은 하나의 신호였다. 예능 프로그램의 주류는 남성 예능인이 주도하는 리얼 버라이어티로 이미 넘어갔고, 박미선 같은 기혼 여성 예능인이 출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기혼 여성 방송인들이 중심이 된 ‘세바퀴’나 ‘해피투게더’ 같은 토크쇼 정도였다. ‘세바퀴’와 ‘해피투게더’의 하차는 여성 예능인에게 그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박미선, 더 나아가 여성 예능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의 끝처럼 보였다. 박미선의 코미디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스탠드업 코미디 ‘별난 여자’로 시작됐다. 예쁘거나 못생기거나, 노처녀거나 결혼을 했거나 하는 식으로 분류되지 않은 그냥 사람들에게 말을 하는 여자. 그래서 오히려 ‘별난 여자’로 불렸던 여자. 하지만 20대 중반 결혼한 뒤 박미선은 ‘별난 여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로 불렸다. ‘해피투게더’와 ‘세바퀴’에 출연할 즈음에는 자연스레 ‘안방마님’으로 불렸다. 그가 예능인으로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할 때, 그 시작은 이봉원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이었다. 심지어 오랜만에 출연한 ‘해피투게더’에서도 이봉원의 이름이 자꾸 거론됐고, 박미선은 “오늘은 그분의 이름이 안 나올 줄 알았는데 천륜인가봐요”라고 말했다. 온전한 자신으로서 존재하기 힘든, 기혼 여성 연예인의 삶. 박미선이 오래도록 걸어온 길이다.

그러나 박미선은 자신에게 규정된 이미지 속에서 무엇이든 했다. SBS ‘순풍산부인과’ 등 시트콤을 접점으로 연기자로 나서기 시작했고, ‘세바퀴’와 ‘해피투게더’ 사이에는 시사 토크쇼였던 MBC ‘명랑 히어로’에서 출연자들이 치고 받는 토크를 깔끔하게 정리했다. ‘세바퀴’와 ‘해피투게더’에서 하차한 뒤에는 SNS를 통해 운동을 하며 달라진 몸을 보여줬고, EBS ‘까칠 남녀’에서 젠더 문제에 관한 다양한 논쟁 등을 다루면서도 비예능인들 사이에서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만들어 나갔다. 지금 박미선에게 모아지는 시선은 이 모든 것이 조금씩 돌아오는 과정이다. ‘순풍산부인과’ 시절 한 에피소드가 SNS에서 밈으로 돌아다니기도 하고, ‘까칠남녀’에서 방송 직전 제모를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거나 노브라로 방송을 하는 등 프로그램의 취지를 직접 보여주는 행동은 그 자체로 이슈가 됐다. 이런 행동들은 또다른 시사 프로그램 KBS ‘거리의 만찬’까지 이어졌다. 이 방송에서 그는 “요즘 지상파에서 여자들끼리만 방송하는 거 별로 없었을걸요. 특히 정치나 시사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있으니까. 어깨가 무겁네요”.라고 말했다. 남성들만의 방송에서 배제당하거나 대상화됐던 인물이, 여성이라는 당사자성을 내세우며 중심에 섰다. ‘안방마님’이나 ‘줌마테이너’라는 단어 자체가 사라져 가는 지금, 박미선은 다시 어떤 다른 정체성도 필요없는 한 명의 여성으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있다.

박미선이 30년을 살아남은 여자가 되는 동안 세상도 조금씩 바뀌어 갔다. 남성이 아닌 여성들이 많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지나친 남성 중심의 방송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박미선은 이런 시대의 변화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그리고 지난 시간 동안 언제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온 여성 예능인으로서 기념비적인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 박미선은 ‘아이즈’와의 인터뷰에서 “딱히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까칠남녀’를 진행하다보니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이 다 이렇게 연결이 되는 구나’라고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여성이어서 기회가 한정되기도 하지만, 여성이기 때문에 또 다른 기회를 얻기도 한다. 개그맨으로서 방송가에서조차 설 자리가 없다고 느낀 그는 요즘 한참 어린 후배들과 함께 연극무대에 선다. ‘가만히 앉아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뭐라도 해보는 것’. 그렇게 30년을 살아남았다. 역사는 살아남은 자의 기록이다. 그리고 박미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떤 역사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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