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선│② “쉬면 뭘 해, 죽으면 실컷 쉴 텐데”

2018.09.18
1988년 데뷔했다. 30년 동안 일하면서 딱 두 달을 쉬었다. 요즘은 20년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 후배들과 한 무대에 선다. 개그맨 박미선의 이야기다. 연극 ‘Shop on the Stage 홈쇼핑 주식회사’ 연습 현장에서 그를 만났다.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들이 만들어낸, 박미선의 오늘이 거기 있었다.

요즘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고 들었다.

박미선
: 하루하루 조금씩 다르다. 일어나서 녹화 있는 날은 녹화하고, 없는 날은 연극 연습을 하거나 홈쇼핑 준비를 한다. 여기서 홈쇼핑은 연극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홈쇼핑이다. 몇 년째 하고 있는데 매출이 장난 아니다. (웃음) 이런 경험들이 연극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Shop on the Stage 홈쇼핑 주식회사’를 통해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했다.
박미선
: 사실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일단 작가들과 굉장히 친해서 그들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었다. 작가들은 나를 염두에 두고 쓴 극본이 아니라고 하는데, 내 이야기 같아서 이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웃음) 백상예술대상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거나 홈쇼핑에 도전하는 설정 같은 거. 솔직히 예전만큼 방송을 많이 하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또 가만히 앉아 있는 성격은 아니다 보니 일을 벌이게 됐다.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의 대부분이 여성 개그맨 후배들이기도 하다.
박미선
: 사실 나는 ‘드립걸즈’의 굉장한 팬이다. 늘 한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이번 공연은 A, B 팀으로 나뉘는데, 같은 작품이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나와 권진영, 이은지가 A팀이고, 김영희, 홍현희, 김나희의 ‘드립걸즈’ 멤버들이 B팀이다. 우리 쪽이 정극 같은 느낌이라면, 저쪽은 좀 더 ‘개그콘서트’ 같은 느낌이 난다. 우리 팀 연습을 보러 온 후배들이 “선배님, 너무 달라요”라고 했을 정도다. 만약 내가 B팀에 가더라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워낙 친한 후배들이고,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사실 남과 호흡을 맞추는 일이니까.

지난 8월 춘천에서 19금 토크쇼 ‘여탕쇼’를 선보이기도 했다.
박미선
: 여자들끼리만 놀아보고 싶었다. 남자들이 그 공연에 들어오려면 여장을 하고 들어와야 했다. (웃음) 권진영과 ‘깔깔마녀’ 김성은, 이렇게 셋이 함께 아이디어를 내서 만들었는데 걸 그룹 안무도 연습하고 ‘아모르 파티’도 녹음했다. 관객들을 보고 오히려 우리가 더 놀랐다. 어떤 여사님이 무대에 올라오더니 정말 미친 듯이 춤을 추더라. 우리가 “이러시면 상을 못 드려요”라고 말리는데도 “자기는 상 안 받아도 된다”면서 끝까지 놀다 내려가셨다. 내가 볼 때는 여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한 데가 별로 없어서 그런 것 같다.

이번 연극도 여성들이 만들고 여성들이 즐길 수 있는 공연 같다는 느낌이다.
박미선
: 아무래도 여자들이 설 만한 무대가 많이 없다. 특히 개그맨들은 예능 프로그램이 아니면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적다. 코미디 연기를 할 만한 곳은 더더욱 드물고. 요즘 보면 예능에는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많이 넘어오는데, 정작 개그맨은 그 영역에서도 좀처럼 자리가 없다. 재능이 있어도 무대가 없는 거다. ‘뭔가 같이 해보면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이런 도전을 하게 됐다.

요즘 스탠드업 코미디가 인기를 끌면서 박미선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던데.
박미선
: 유병재나 김제동이 하다 보니까 관심을 끄는 것 같다. 사실 내가 88년에 데뷔했을 때, 스탠드업 코미디를 했다. 제목이 ‘별난 여자’였는데 사람들이 처음에는 되게 신기하게 생각했다. 희화화되지 않은 평범한 얼굴의 여자가 나와서 말로만 웃기는 코미디는 처음이었거든. 시도가 좋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 맥을 못 이었다. 사실 스탠드업 코미디는 정말 쉽지 않다. 5분을 위해서 일주일 내내 하루 10시간씩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각본을 썼으니까. 그래서 현재 상황에서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기는 그때보다도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요즘에 ‘순풍산부인과’ 패러디나 SNS에서의 발언들이 화제가 되는 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박미선
: 나는 옛날에도 지금도 내가 웃기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가짜웃음 진짜웃음’ 같은 것도 그냥 내 성격이 그런 건데 사람들이 재미있어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요즘에는 보는 사람들이 재미거리들을 만들어가는 것 같다. 조세호를 ‘프로불참러’라고 하는 것처럼. 내가 그런 것에 바로 반응하니까 더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이는 들었지만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유튜브에서 뭐가 유행’이라고 하면 궁금해서 얼른 찾아본다.

얼마 전 KBS ‘해피투게더’에서 ‘홍보 아니면 내가 왜 나왔겠느냐’라는 말도 화제가 됐었다.
박미선
: 그것도 말 그대로다. 게스트로 나를 찾는데 피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그런데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뼈 있는 농담’처럼 받아들인 것 같다. 사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다. 지나간 것을 돌아보는 스타일은 아니다. ‘해피투게더’를 그만둘 때를 돌아보면 당시 내가 너무 티를 내고 서운해한 것 같다는 후회가 든다. 나뿐만 아니라 방송 일이라는 게 언제나 일방적이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프리랜서니까 언제든지 잘릴 수 있다. 대중이 나를 원하지 않으면 떠나야 한다.

EBS ‘까칠남녀’나 KBS ‘거리의 만찬’ 등 최근 젊은 층이 관심을 가질 만한 프로그램의 진행을 많이 맡았다. 박미선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박미선
: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들이 있어도 보여줄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요즘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요구가 커지면서 ‘까칠남녀’나 ‘거리의 만찬’ 같은 프로그램들이 생겼고, 나는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 목소리를 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게 시대와 맞아떨어진 거다.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서 두려움은 없었다. 나에 대한 댓글을 다 읽어보는 편인데, 욕을 먹더라도 ‘욕을 하는 사람에게는 욕을 하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한다. 그게 타당한 이유라면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말도 안 되는 이유라면 무시한다. 30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그 정도의 변별력과 멘탈은 갖추게 됐다. (웃음)

쉽지 않은 프로그램이었던 만큼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다.
박미선
: 딱히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까칠남녀’를 진행하다 보니 ‘내가 고민하고 있었던 부분이 다 이렇게 연결되는 구나’라고 깨닫게 됐다. 예를 들면 ‘유리천장’이나 ‘기울어진 운동장’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건 나나 여자 후배들이 방송을 하면서 늘 느껴왔던 문제다. 남녀 출연료의 차이라든가, 프로그램에 들어가는 성비도 그렇다. 늘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들을 ‘까칠남녀’를 통해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됐다. 어떤 프로그램을 하든지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면 공부를 많이 하는 편인데, 그런 면에서 굉장히 공부가 많이 된 프로그램이었다.

‘거리의 만찬’ 첫 회에서도 ‘여성들이 이런 이슈에 관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편견을 직접적으로 언급했다.
박미선
: 방송에서 여성 예능인에게 원하는 이미지는 정해져 있다. 결혼을 하고 나이가 많아지면 ‘주책맞은 아줌마’로서 남편 험담을 하기를 원하지, ‘지금 너무 행복해’라는 말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남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데, 방송에서는 인간 박미선이 아니라 이봉원과 결혼한 박미선을 원했다. 그렇게 사회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뉴스 같은 건 안 볼 것 같은 이미지로만 비춰져온 것 같아서, 나에게 이런 면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최근 방송에서 여성에게 원하는 바가 달라졌다고 느끼나?
박미선
: 조금은 달라졌다. 사실 그동안 너무 많은 방송이 남성 위주로 만들어졌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제 슬슬 시청자들이 물릴 때가 된 것 같다. 여성들의 이야기가 수면으로 올라오면서 방송의 트렌드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요즘엔 내가 나이가 있으니까 이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올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양보하고 싶지는 않다. 여기는 프로의 세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해볼 거다. 내가 능력이 떨어져서 일을 못하면 양보하지 않아도 내 자리를 뺏으러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후배들이 많았으면 좋겠고. 그런데 아직까지는 자신 있다. (웃음)

여전히 여성 방송인들은 자신들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한다.

박미선
: 올해로 데뷔한 지 30년이 됐는데 첫째 낳고 한 달, 둘째 낳고 한 달, 딱 두 달 쉬었다. 운 좋게도 경력 단절이 없었던 셈이다. 나는 좀 특이한 케이스고, 특히 옛날 가수나 배우들은 결혼과 동시에 활동을 접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후배들도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었고 콘텐츠도 다양해졌기 때문에 너무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어 결혼이나 출산도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걸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다. 다만, 이것도 연예인에게나 한정된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경우 경력 단절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먼저 경험해본 입장에서 ‘끝까지 버텨라’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금방 큰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절대 미안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미안해’라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은 진짜 엄마가 자기들한테 미안한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워커홀릭 같다.
박미선
: 맞다. (웃음) 예전에는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즐기고 있다. 나는 50살이 넘었고, 이제껏 열심히 일해온 대가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 아이들도 잘 컸고, 남편도 자기 일 열심히 하니까 나는 나대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작년에 복근을 공개하며 버킷리스트가 있다고 말했는데.
박미선
: 복근 만들기나 금발 말고도 해보고 싶은 게 많다. 정말 해보고 싶은 것은 외국에서 혼자 한 달 살아보기. 아직까지 완전히 혼자 살아본 적이 없다. 또 12월 연말에 뉴욕으로 가서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고 싶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스케이트도 타고 카운트다운도 해볼 거다. 딸과 단둘이 북유럽을 여행하는 것도 내년쯤 계획하고 있다. 내가 여행 다니는 걸 진짜 좋아해서 올해도 한 달에 한 번은 해외여행을 갔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간다. 쉬면 뭘 해, 죽으면 실컷 쉴 텐데. (웃음)

작년 ‘부산국제코미디페스티벌’에서는 개그맨 최초로 디너쇼를 하기도 했다.
박미선
: 주최 측에서 중장년층이 볼 만한 공연이 없다고 하기에, 마침 데뷔 30주년이기도 해서 디너쇼를 해보겠다고 했다. 30년 동안의 활동을 되돌아보는데, 정말 오래 하긴 오래 했더라. 심지어 ‘봉숭아학당’ 선생님도 내가 제일 오래 했다. 그런데 막상 디너쇼를 준비해보니까, 내가 진짜 개인기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공연 시간을 어떻게 채웠는지 모르겠다. (웃음) 오히려 ‘재주가 없어서 살아남았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매순간 최선을 다해야 했다. 30년 동안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살았다. 집에 가면 늘 기절하는데, 그렇게 살아야 살아 있는 것 같다. 누군가 나를 찾아준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고, 말 그대로 보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 현역 여성 개그맨 중에 내가 제일 오래 한 사람이 됐는데, 그래서 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선배님처럼 오래 하고 싶어요’라는 말을 들으면 책임감이 느껴진다.

30년 동안 안 해본 것 없이 다 해봤지만, 그래도 새롭게 도전하고 싶은 분야가 있다면?
박미선
: 진짜 뮤지컬만 빼고 모든 걸 다 해봤다. 그런데 뮤지컬은 안 될 것 같다. 노래를 너무 못해서. (웃음) 최근 영화 ‘마녀’를 봤는데, 거기서 조민수가 연기한 역할이 너무 멋있었다. 그런 진짜 쎈 악역을 한번 해보고 싶다. 박미선이 할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역할. 언젠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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